1년 5개월여 전인 2012년 12월초에
경기도 용인 홍길동전의 허균 묘소를 다녀왔던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금 그곳을 찾았다.
당시 안내간판이 전혀 없어
허균 선생의 묘소를 찾는데 무척이나
힘들었던 기억과 블로그 포스팅을 하면서
용인시 관계자분들께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다.
그 후 제 블로그를 방문하시던 주변 동네에 사시는
연세 많으신 어르신 한분이 용인시와 원삼면에 몇번의
전화 항의를 한후 입구와 묘소 앞에 작지만
안내 간판이 생겼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시대적인 상황으론 비록 역적이었지만
국문학적 가치와 문화재 보존측면에서 바라봤을땐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었다.
봄빛 고운날 다시 찾은
홍길동전 허균 선생의 묘소에서
당시에 볼 수 없었던 할미꽃도 만나고
두개의 안내 간판을 볼 수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는 사실...
양지나들목에서 출발하여 17번 국도로 안성방향으로 가다가
맹리를 조금 지나서 내려서면 이렇게 작은 안내간판이 어렴풋이 보인다.
물론 예전엔 없던 것이다.
묘소앞에 도착하면
조금은 독특한 구조의 집 한채가 보이고
노랭이 개나리들이 군락으로
여행자를 반겨준다.
별도의 주차장은 없으며
작은 도로변에 노면 주차가 가능하다.
천봉기념비(遷奉記念碑)
허균(許筠)의 가족 묘역(墓域) 입구에 세워진 천봉기념비(遷奉記念碑)를 세운 이유는
원래 허균가족묘지는 본래 서울 서초동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인해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산63의 현재 자리로 옮겨졌고
이를 기념해 1968년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허균(許筠)묘지의 위치는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수정산 산63에 있다.
영동선 고속도로 원주방향으로 가다가 양지 인터체인지로 진입한다.
계속 직선하여가면 맹리가 나오는데 우측으로 내려가 굴다리 밑으로 좌회전하여
약 700m가면 눈앞에 양천허씨 (陽川許氏)가족 묘지가 보인다.
최근에 입구와 묘지 앞에 작은 안내간판이 생겨
그나마 좀 찾아가기가 수월해진 셈이다.
1969년에 세워진 허균의 누이 난설헌 허초희의 시비
난설헌 허초희의 묘는 경기도 광주
시댁 묘지에 함께 있다.
겨울철에 방문했던 예전엔 못보던 꽃인
할미꽃이 이렇게나 반겨주었다.
허균의 가족묘역은 양천 허씨 종중 묘들이 모여 있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산63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허균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들인 허성과 허봉,
그리고 부친인 허엽 부부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허균의 누이인 허초희는 경기도 광주 시댁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허난설헌의 묘는 이 묘역에 없고
경기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29-5 에 있는
허난설헌 시댁의 묘역에 같이 있으며 이곳 묘지에는
난설헌 허초희의 시비만 있다.
봄빛 진달래도 무척 반가운듯
화사한 미소로 화답을 해 주고 있었다.
처음 방문이 아니어서 쉬이 찾을수는 있었지만
이곳 묘지에서 특정인의 묘소를 찾는다는건
결코 쉬운일만은 아니다.
저만치 맞은편에 두 묘소가 보이는데
우측이 허균의 묘소이다.
허균의 형의 무덤앞을 지키는
할미꽃이 그저 앙징맞기도 하고 이쁘다.
설움을 노래하는걸까 왠지 애달퍼 보이기도 하다.
허균의 묘지다.
허균(許筠)은 선조 2년(1568) 11월 3일
강원도 강릉 외갓집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단보(端甫) 호(號)는 교산(蛟山)이다.
교산(蛟山)은 허균의 생가이며 외갓집인 애일당(愛日堂) 부근에
조그마한 언덕 같은 야산으로 마치 용(龍)이 되지 못한
구렁이인 이무기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으로 되어 있어
그 언덕을 따서 지은 호(號)다.
허균(許筠)은 선조 22년(1589)에 생원이 되고
선조 27년(1594)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지냈다.
선조 30년(1597)에는 문과 시중에 장원급제하였고 이듬해 황해도 도사가 되었다가
서울 기생을 끌어들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선조 39년(1606)원접사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여
명문장으로 명성을 떨쳤고 광해군 5년(1613)에는 계축옥사(癸丑獄事)로
한때 친교가 있던 박응서 등이 처형되자 신변의 안전을 위해
당대의 권신(權臣) 이이첨에게 아부하여 예조참의 호조판서 승문원부제조를 지냈으며
광해군 9년(1617)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같은 해 좌참찬으로 승진되었으나
이듬해 하인준 등과 반(反) 광해군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가산(家産)이 적몰(籍沒)되고 8월 24일 50세를 일기로 참형(斬刑)되었다.
반역죄(反逆罪)로 참형(斬刑)을 당하여 시신을 수습할 수 없어서
그의 혼(魂)만을 달래는 초혼장(招魂葬)을 치르게 되어
허균의 묘에는 시신(屍身)이 없다고 한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저(名著)를 남겼으며
문집으로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가 있다.
허균의 묘소에서 만난 제비꽃 한송이...
그의 묘소앞엔 할미꽃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봄빛 가득한 날 만나는 할미꽃은
또 다른 전설인양 여행자의 발을 붙잡으며
뭐라고 메세지를 전하는듯 하였다.
허균의 한시 한수를 소개 한다.
감흥(感興)
허균(許筠)
中夜起四望(중야기사망) - 밤중에 일어나 사방을 들러보니
晨辰麗晴昊(신진려청호) - 별들이 갠 하늘에 곱기도 하여라.
溟波吼雪浪(명파후설랑) - 푸른 바다에 눈 같은 물결 포효하고
欲濟風浩浩(욕제풍호호) - 건너려니 바람이 너무나 넓게 부는구나.
少壯能幾時(소장능기시) - 젊음은 몇 때나 지탱할런가.
沈憂使人老(침우사인노) - 근심에 잠기니 사람이 늙어간다.
安得不死藥(안득불사약) - 어찌하면 죽지 않는 약 얻어
乘鸞戲三島(승난희삼도) - 난새를 타고서 삼도를 노닐어 보꺼나.
허균의 묘지에서
의외로 많은 할미꽃을 만났다.
무슨 연고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의 묘소 뒷편 언덕으로 올라가 보았다.
아련한 전설처럼 보잘것 없는 작은 묘소에서
당대 최고의 문학가 허균 선생을
가만히 추억해 보았다.
홍길동전에서 꿈꾸며 노래하던 것들에서
후세에 전해질 자신의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처량하게 고개숙인 할미꽃들이
도리어 벗인양 그의 처지를 더더욱
안타깝게만 하는것 같다.
허균의 묘소 뒷쪽 언덕에 있는
아버지 초당 허엽 선생과 어머니 청주 한씨의 묘...
역적으로 몰린 허균이 참형되고난 후
허엽의 묘비는 두동강이 나서 땅에 파묻혔다고 한다.
그후 다시 회복되었지만 그 흔적은 지울길 없어
저렇게 상처투성이로 남아있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許曄)은 중종 12년(1517) 출생하였고
호(號)는 초당(草堂)이다.
강릉 초당의 호(號)에서 따온 마을 이름이며 초당 두부로 유명하다.
명종 1년(1546)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대사간에 오른 후에는 향약(鄕約)의 시행을 건의 하기도 하였다.
선조 8년(1575)년 동서(東西) 분당으로 당쟁이 시작되자
훗날 허균의 장인이 되는 김효원의 추대를 받아 동인의 영수로 활동하였으며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가 병으로 사퇴하고
서울로 올라오던 길인 선조 13년(1560) 2월 4일
64세로 상주 객관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첫부인 청주 한씨와 사이에 장남 허성과 두딸,
그리고 후처인 강릉 김씨와 사이에 허봉 허균 허초희를 두어
총 3남 3녀의 자손을 남겼다.
허엽은 화담 서경덕과 퇴계 이황의 제자로 학문을 배웠다.
대사헌으로 재직하면서 바른 말을 잘 했던 것으로 이름났는데
그런 까닭에 선조(宣祖)가 허엽을 귀중히 여겼다.
허엽은 경전(經典)의 훈계를 좋아하여
늙으면서도 그 마음가짐을 단정히 했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를 어진 인물이라 칭송하였다.
혀균의 집안은 고려시대로부터 이름난 문벌(門閥)이었다.
부친 허엽(許曄)과 그의 아들인 허성, 허봉, 허균,
그리고 사임당 신씨, 황진이와 함께 조선 3대 여류문인으로
평가 받는 난설헌 허초희까지 모두 당대 재상과 문사(文士)로 이름을 날렸다.
한 집안에서 한명도 나오기 힘든 대문인(大文人)이 동시대에
다섯 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분명한 축복이었다.
그러나 이 집안은 막내 허균이 광해군에 대한 반역죄로 말미암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말았다. 왕조국가에서 혁명이라 함은 곧 반역(叛逆)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꿈이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은 자신과 집안의 처참한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다. 허균이 참현된 후 그의 집안도 철저하게 몰락하였다. 일설에는 허균으로 인해 집안이 망하자 허엽의 무덤에서 통곡소리가 들렸다고도 한다. 허균은 여러모로 당시의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을까? 허균은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무장되어 있던 조선사회에서 명나라에 갔다가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천주교를 들여와 믿었으며 홍길동처럼 차별받는 신분들에 의한 혁명을 꿈꾸었다. 그러나 허균에게 그 시대는 자신의 시대가 아니었다. 판결문에서 서명을 거부한 채 사형장으로 끌려 나가면서 “할 말이 있다”고 외쳤지만 허균은 최후의 일성(一聲)은 그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과연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난설헌 허초희의 시비를 에워싸고 있는
진달래 군락이 애처롭기만 하다.
왕릉 방문때와는 또다른 기분으로
홍길동전 허균 선생의 묘소를 방문하였다.
두번째 방문에서는 예전에 없던 입구의 안내간판을
만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봄날이어서
더 향기로운 홍길동전 허균 선생의
묘소 방문이었다.
용인시 원삼면 맹리에는 허균의 묘소가 있다.
하지만 그의 시신은 없다.
그곳에는 그의 아버지 초당 허엽과 허균의 두 부인 그리고
허균의 형 등 가족묘지와 난설헌 허초희의 시비와
한석봉의 필적까지도 덤으로 둘러볼 수 있는
귀한 문화재들이 참 많았다.
조선 광해군 당시의 시대를 논하긴 뭣하지만
역적으로 참형당한 허균 집안의 문학적인 가치는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것이다.
허균의 묘소를 두번째 방문하면서
예기치 못하게 할미꽃 군락을 만나
더 더욱 애잔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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