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을 다녀왔습니다.
조선시대 고궁이라곤 경복궁을 한번
방문했던게 전부인 제겐 가슴 두근거리는
설레임의 방문이었습니다.
연두빛 오월의 신록이
덕수궁 뜰에도 어김없이 내려앉아
유난히 꽃대궐 같았습니다.
대한문을 통과하여
서서히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덕수궁은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사적 12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휴무일 : 매주 월요일
휴일을 맞아 방문하신 분들과
많은 어르신들이 편히 휴식하고 있더군요.
이곳의 라일락 향은 정말 진했습니다.
근처에 가기도 전에 벌써 코끝으로 전해질 정도였습니다.
거니는 곳곳이 울긋 불긋합니다.
서울 도심의 고층빌딩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덕수궁...
여긴 탁한 물빛의 연못이지만
작은 섬의 진달래 군락이 풍덩 빠져 있더군요.
워낙에 좋은 계절에 방문을 해서
더 운치있어 보이고 초록의 싱그러움이
더 없이 향기로웠습니다.
새로이 피어나는 꽃이나
이렇게 바닥을 뒹구는 낙화마저도
고궁의 서정을 품안에 담아내기엔 너무 좋았습니다.
마알간 꽃들과 어우러진 발걸음들이
다들 어찌나 가벼운지...
포스 좋으신 진사분들도
더러 오셨더군요.
이제 제대로 덕수궁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그럼 먼저 덕수궁에 대해서
인터넷 자료 등으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요약설명]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원래는 조선왕조 9대 왕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진하였던 선조가 환도하여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다가
광해군 때 정식으로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광해군이 창덕궁을 재건하여 정궁으로 삼은 후
이곳은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대한제국의 궁궐”
구한말 신변에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했던 고종은
1897년 1월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경운궁 주변에 외국 대사관들이 밀집하여 있었으므로
고종은 그같은 국제열강의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같은 해 10월 고종은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선포하면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1907년 고종황제는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하는 수모를 겪는데,
이때 그가 거처하던 궁도 ‘상왕이 덕을 누리며 오래 사시라’는,
퇴위의 의미가 담긴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가장 번성했던 1900년 초에는 궁의 영역이
서쪽 경희궁과 구름다리로 연결될 정도로 확대되었으나
고종황제 승하 후, 나라의 주권을 잃게 되면서 덕수궁도 그 위상을 잃고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1933년에는 대부분의 전각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은 원래 궁역의 30퍼센트 정도이며
전통건물 외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건물 내부에 서양식 장식들이 혼재되어 있어
격변기 혼란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세설명]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다음 문화재 자료 발췌 -
앞에서 설명드린바와 같이
서양식 건축물들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잘 보존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느끼고 가슴으로 채워 올 수 있어
너무 좋은것 같습니다.
이곳은 관리인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안내 및 청소, 경비 등의 업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것 보다 제발 엉뚱한 화재사고 같은건
절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문화 해설사분의 설명을 듣는 눈빛들이
너무나 진지하더군요.
고궁과는 다소 조화가 안되는
서양식 건축물이지만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서울시청 바로 앞에 위치한 이 덕수궁을
예전에 몇번이나 지나쳤습니다.
업무적인 일로 이 근처를 다녀가기도 했지만
제가 촌놈이라서 여기에 덕수궁이 위치한줄을 몰랐거던요^^
그래서 이번엔 남대문 복원 기념식에 다녀오면서
작정을 하고 덕수궁을 다녀왔습니다.
꽃잔치가 좋아서 피어나는 화사한 미소 또한
그 꽃을 닮아 아름답기만 합니다.
젊은 진사분들이 사부님과 함께
야외수업을 받기도 하더군요.
연두빛 오월과 어우러진 고궁 나들이...
다소곳이 힐링할 수 있는 멋스럼이
오래도록 기억될것 같습니다.
덕수궁은 고궁으로서 워낙에 유명한 곳이지만
저처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에겐 정말
가슴 두근거림의 시간일것 같아요.
몇가지의 꽃을 보았는지
그 종류를 헤아릴 수가 없네요..ㅎㅎㅎ
말 그대로 완전 꽃대궐이었습니다.
앞에서 설명을 보았듯이
구한말 안타까운 역사를 간직한 덕수궁...
근엄한 왕의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듯 하더군요.
고궁엔 원래 이렇게
어르신들이 많이 찾으시는가 봅니다.
도심 한가운데 빌딩 숲으로 에워쌓인 덕수궁...
처음 경복궁을 방문했을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이곳 덕수궁이 규모는 더 작지만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다르더군요.
푸르른 신록이 방문객들을 품어 주어서
묵언하듯 거닐기 좋고 나눔하기 참 좋은것 같습니다.
고궁 거닐기에서 느낄 수 있는
자신만의 그 평온함이 아주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을것 같거던요.
이렇게 서울 도심의 고궁
덕수궁을 홀로 거닐었습니다.
사색하면서 더 천천히 둘러봐야 했는데
시간 사정이 여유롭지 못해 다소 아쉬웠지만
당시 아픈 역사의 덕수궁이 지금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것 같아서
한편으론 다행스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꽃대궐 덕수궁...
짧은 시간 가슴으로 담아낸 기록물들이
카메라로 담아낸것 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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