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무신
이완 장군의 묘지를 다녀왔습니다.
이완 장군의 묘는
저희 회사에서 아주 가까우며
불과 몇 km 떨어지지 않은곳에 있으며
여주 첼시 아울렛 들어가는 길목에 있답니다.
입구에는 명성황후의 생가가 있으며
영동고속도로 여주휴게소와도 아주 가까운 거리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인터넷으로 이완 장군에 대한
여주군청의 자료도 발췌해 보고
개인적으로 다시한번 이완 장군을 재조명해 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완 장군은 선조 35년(1602)에 출생한
조선조 효종때의 무신으로서 1624년(인조 2)에 무과에 급제하여
상원군수를 거쳐 1631년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완 장군의 묘지를 들어가는 길은
주차장에서 논두렁을 지나 이런 작은 야산
진입로를 거치게 됩니다.
이완 장군의 묘는
여주군 여주읍 상거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너무 초라하다는 것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대체적인 평가라고 합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하구요.
장군의 묘소를 향하면서
입구쪽에서 또 다른 묘지를 우선적으로 만나게 된다.
정확하게 누구의 묘지라고 표기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완 장군 묘의 전면...
이완 장군 그는누구인가?
효종과 함께 피고 진 미완의 북벌론자로 알고 있다.
본관은 경주. 자는 징지(澄之).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정익(貞翼). 인조반정의 공신인 무신 이수일(李守一)의 아들이다.
인조 2년(1624년) 무과에 급제했다.
만포첨사와 각지의 수령을 거쳐 인조 9년(1631년)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됐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 김자점(金自點) 원수(元帥) 휘하의
별장(別將)으로 정방산성(正方山城)에서 공을 세우고
함경도 병마절도사와 경기도 수군절도사가 됐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한 후 송시열 등과 북벌(北伐)을 계획할 때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발탁됐으며 다시 훈련대장(訓練大將)이 돼
신무기 제조와 성곽 개수, 신축 등 전쟁 준비를 했다.
당시 제주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신무기를 만들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완장군의 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이완장군은
효종 6년(1655년)에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이 됐고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뒤 다시 훈련대장이 됐지만
1659년 효종의 승하(昇遐)로 북벌을 실현하지 못했다.
현종 10년(1669년) 훈련대장에서 물러난 이후
관직을 계속 사양했으나
1674년에는 수어사를 거쳐 우의정이 내려졌다.
말 먹이를 직접 줄 만큼
확고한 자세의 무장으로
정치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효종의 북벌정책을 보필해 국방체계와
군비, 병력을 정비하는 데 기여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효종과 함께 피고 진 미완의 북벌론자이다.
이완 장군의 에피소드 하나
젊어서 사냥을 하다가 길을 잃었다.
마침 산속에 여인 혼자 사는 큰 집을 발견하고 묵기를 청했다.
여인은 도적의 소굴이라 해 거절하지만
이완은 안방에 들어가 저녁을 청해 먹고 여인과 하룻밤을 보낸다.
마침내 집주인인 도적이 왔으나
함께 술 먹기를 청하는 이완의 기개에 감탄한다.
“훗날 포도대장 감을 만나게 될 것이니
그때 구명(救命)의 증표를 받으라”던
점쟁이의 말이 생각난 도적은 훗날을 위한 증표를 받는다.
세월은 흘러 이완이 훈련대장과 포도대장을 겸할 때
큰 도적이 잡혀 오니 바로 그 사람이다.
이완은 약속을 지켜 도적을 부하로 삼았는데
도적은 남다른 용맹과 충성을 보였고 후에 방어사에 올랐다.
이완의 그릇과 신의의 실천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완 장군의 묘...
봉분을 중심으로 좌우 및 후편에 120㎝의 곡장(曲墻)이 있고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
장명등(長明燈)이 중심선에 위치한다.
또 좌우로 동자석(童子石)·망주석(望柱石)
문인석이 각 1쌍씩 차례로 배치돼 있다.
묘비는 봉분의 오른쪽에 있다.
묘지 앞의 상석에는
몇일전에 내린 하얀 눈이 그대로였다.
아무도 찾는이가 없는건지
손대지 않은 겨울색의 상석에서
왠지 모를 을씨년 스러움이랄까 아니면
초라한 외로움이 느껴지는 건 어인일인지 모르겠다.
방문객의 맘이려니 하면서도
무척이나 짠한 맘이 든건 사실이었다.
이완 장군의 에피소드 둘
효종 북벌의 기둥이었던 송시열이
무명인 시절 한양 가는 나룻배를 탔는데
나룻배가 강 가운데 이르자 술 취한 사람이
가마를 열고 신행 가는 아녀자를 놀렸다.
덩치가 어찌나 크고 안하무인인지
사람들은 눈살만 찌푸리고 있었다.
이때 송시열이 사냥하고 오는 청년에게
강 위에 있는 오리 한 마리를 쏘아 잡아 달라 했다.
청년은 잠깐 생각을 하더니 활을 들어
오리를 쏠 듯하다가 갑자기 돌려 그 사내를 쏘았다.
그 청년이 이완이었고,
이 인연으로 둘은 훗날 북벌에 대한
뜻과 행동을 함께하기에 이른다.
이완 장군의
묘지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하얀 눈위에 새겨진 몇몇의 발자국~~
한 시대를 풍미했을 장군의 기상을 느껴보려 했지만
바람끝 차가운 겨울날의 그 특성상
싸늘한 기운만 감돌았다.
주차장에서 차를 돌려
시내쪽으로 100여m 정도 내려오는데 아주 우연히
도로변에 위치한 이수와 귀부의 비각을 발견하고
차를 길가에 정차하였다.
사실 당시만 하더라도 현장에는 안내문이 전혀 없어
이 이수와 귀부의 비각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여주군청의 자료를 뒤지다가
이 비가 이완 장군의 신도비인것을 알게 되었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역으로부터 10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특히 숙종 14년(1688년)에 건립된 신도비는
이수, 비신, 귀부로 구성됐는데 이수의 이무기와 귀부의 거북이 모습이
매우 생동감 있게 조각돼 있다.
비문은 송시열이 글을 짓고 민정중이 글씨를 썼다.
화려한 문양의 이무기 이수....
비문의 글은 상당히 많았다.
송시열이 글을 짓고 민정중이 글씨를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거북이 형국의 귀부....
정교한 조각작품을 보는 듯
귀부의 머리 부분은 아주 섬세하게 작업되어 있었다.
귀부의 후미 부분...
전형적인 거북등의 모양새를 띠고 있었으며,
특별히 지정관리 되고 있지는 않은것 같았다.
작은 안내 표지판이라도 설치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완 장군의 묘지와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고
도로변에 막연하게 자리하고 있어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좋았다.
세상을 살면서
아주 가까운 우리 주변에 이렇듯
소중한 역사적인 사료들이 많이 산재되어 있다.
굳이 국보와 보물 그리고 천연기념물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고개를 돌려보면
예기치 못한 문화재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것 같다.
멀리서 찾아보기 전에
내가 근무하고 있는 또는
내가 살고있는 인근 지역에서의
문화재 탐방도 우리네 또 다른 재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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