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춘향전의 이몽룡은 실존인물이었다...

금모래은모래 2012. 1. 25. 17:14

 

 

 

 2012년도의 설 명절도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설 명절에 복들은 많이 받으셨는지요^^

 

저는 고향인 경북 영양과 처가댁이 있는

경북 봉화를 경유하고 처 외가댁이 있는

경북 영주까지의 방문을 무사히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했습니다.

 

구순의 처 외할머니께서 생존해 계시고

처가댁을 방문하는 길목이라 해마다 처 외가댁을

들러 처 외할머니께 새배도 드리고 온답니다.

 

그런 와중에

'오전약수터'로 유명한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의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생가라는 곳을

잠시 시간내어 다녀오기도 했구요.

그래서 오늘은

이몽룡의 생가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

몇컷의 사진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 자신부터 춘향전의 이몽룡이 실존인물이 아닌

단순히 소설속의 인물로만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호기심 반 의문 반으로 접근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몽룡 생가 안내 표지판...

 

 

아래와 같이 이몽룡 관련 자료를 각종

인터넷 매체를 찾아서 한번 정리를 해 보았다.

이 내용의 실체 및 정확성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기가 좀 거시기 하군요.

 

 

[관련자료는 펌글]

경상북도 봉화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문수산과 구룡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높고 험준한 산맥들로 이루어져

개발이 더딘 천혜의 자연경관을 간직한 곳이다.

또한 조선시대부터 유교적인 전통질서 속에 자리잡은 종가와

덕망있는 선비들을 길러낸 양반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곳은 산속 오지라 변화의 바람이 작고 사람들의 성향도

대체로 보수적이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의 전통과 문화유산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춘양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실전 인물이 살았던

계서 성이성 선생님의 종택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듣기 위해서

찾아보았다고 하자.

불쑥 찾아나선 낮선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부인 강순자(65세)님과 함께 무척이나 반겨 주셨다.

13대 종손 성기호님은 몇 년전

도시에서 공직생활 등으로 건강이 안좋았으나

퇴직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일에 푹 빠져 살다보니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봉화 산골의 농촌은 아직도 물과 공기의 오염에서 벗어나 있어

그곳에 가서 살기만 하더라도 건강이 지켜지는 모양이다.

잠시 고택과 청백리 계서 성이성 선생에 대한 고문서 사본을 참고하시어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부인께서는 차와 함께 감홍씨를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드리운 대청마루로 내다주셨다.

 

현재 계서종택은 주변마을과 붙어있어 조화를 이루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봉화군의 적극적인 예산지원을 받아

체계적인 복원을 이룰 것이라는 귓뜀도 덧붙이셨다.

머지않아 계서종택이 문화축제와 관광 체험장으로

휼룡히 자리잡아 갈 것을 기대해 본다.

 

 

 

 

계서종택 입구에는

이렇게 누렁이가 가장 먼저

오는이를 반겨주었다. 

 

 

 

 

계서종택 입구에서 둘 남매 인증 샷...

날씨가 넘 추워서 모델들의 인상이 영 시원찮다...ㅋㅋㅋ  

 

 

 

 

계서종택 안쪽..

 

  

계서종택을 자세히 소개하자면

조선 중기의 문신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이 거주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쓰던 곳으로, 광해군5년(1613년) 건립하였다.

속 문화재로 안채, 사랑채, 사당이 있다.

경사진 산록에 건물을 남향으로 배치하여 우뚝 솟아 보이는데,

왼쪽으로 10m 떨어진 곳에 사당을 배치하고 주위에 와편담을 설치하였다.

건축형태는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이며

사랑채와 중문간(中門間)으로 이어졌다.

안채는 정면 5칸으로, 측면 3칸은 대청이며 좌우 2칸은

안방과 상방이 대칭으로 놓여졌다.

 

안방과 상방 뒤에는 마루방을 각각 반 칸씩 설치하여 반침으로 사용한다.

안방 부엌은 마당 쪽으로 길게 뻗어

중문간이 있는 앞채와 직각으로 만나며,

상방 앞의 부엌은 반 칸을 내밀어 사랑채 부분과 1m 정도 틈을 두었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으로

후대에 증·개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면 3칸과 좌측면 2칸에 ‘ㄴ’자형 마루를 설치하고

기둥 바깥으로 헌함(軒檻: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깐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을 두었다.

 

마루 뒤쪽에는 사랑방, 책방, 사랑윗방 등을 배치하였으며

양측면은 널벽으로 꾸미고 널문을 달았다. 전면은 누다락같이 꾸몄으며,

누 아래의 방주(方柱) 사이는 잡석쌓기 위에 토벽을 쳐서 막았고

누 위의 방주 머리에는 주두(柱頭)를 놓았다.

 

 

 

 

1. 성이성과 이몽룡의 배경의 유사점

성이성이 임금에게 받은 어사화, 영주에 있는 묘의 비문,

광한루 사적비에 나타난 성이성은 춘향전의 이몽룡과 비슷한 점이 많다.

성이성은 아버지가 남원부사를 역임하던 시절 남원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고,

이후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남원을 떠나야 했다.

이는 이몽룡이 춘향과 헤어지는 대목을 연상시킨다.


2. 성이성의 과거 급제 여부

성이성의 과거급제 사실은 규장각이 소유하고 있는 과거 합격자들의

명단 기록서인 <국조방목>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는 3년에 한번씩 실시하는 정기과거시험인 식년시에 합격했다.


3. 성이성의 암행일지

과거에 합격한 후 성이성은 4차례나 암행어사를 하게 된다.

이에 대한 기록은 그가 친필로 쓴 <암행일지> 원본과 인조실록의

어사파견기록에 있는데, 성이성의 이동경로는 이몽룡의 행적과 거의 같다.


4. ‘금준미주’ 시를 읊은 성이성

성이성이 이몽룡처럼 변사또를 응징한 남원 출두 기록은 없다.

그러나 춘향전에 나오는 잔치연에서 이몽룡이 읊은 금준미주시를

성이성이 읊은 것은 사실이다.

이는 <교와문고>와 그의 스승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성이성이 이몽룡의 실존 모델임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5. 성몽룡이 아닌 이몽룡

춘향전에서는 성씨 성을 몽룡이 아닌 춘향이에게 붙여 주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성이성의 내력에 대해서 공개를 거부하고 숨기기만 하던 성씨 문중이

최근에 들어 이몽룡이 성이성을 모델로 했음을 인정했다.

즉, 그 후손들이 기생과 사랑놀음에 빠진 조상을 부끄럽게 여겨

공개를 막았던 것이다.

이것이 성도령이 이도령이 된 사연이다.


6. 성이성이 광한루에 간 까닭

순천에서 출두하였던 성이성은 이후 암행을 끝내고 남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눈보라가 심해 앞을 분별하기 힘든 날씨에도 불구하고

굳이 광한루로 나갔다.

그곳에서 성이성은 늙은 기생 여진과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소년시절의 일을 생각하여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고

그의 일기는 적고있다.

어사일지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광한루 방문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소년시절의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몽룡은 실존 인물이었다.

 

인조시대 호남 암행어사 성이성.

그는 눈보라가 심한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춘향이의 고향,

전라도 남원 광한루로 향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
‘서리와 함께 난간에 앉으니 눈빛이 뜰에 하얗게 깔려있고

대나무숲이 희었다.

나는 소년시절의 일을 생각하여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유년시절의 이몽룡이

즐겨 오르내렸다는 계서당 뒷편의

수령 500년의 소나무앞에

이몽룡의 13대 종부가 직접 타준 맛있는 한방차 한잔을 들고서

고딩 2학년에 올라가는 울 둘째녀석이 폼잡고 서 보았다.

  

 

 

 

 

계서 성이성 종택 우측에 나란히 자리한 계서공 사당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으로 납도리 3량가 구조이며,

내부에 운궁(雲宮)과 감실(龕室)이 있다.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후면은 홑처마이다.

사당 정면에 있는 사주문은 각기둥의 맞배지붕으로

중방을 기둥 상부에서 연결하여 다락을 꾸몄다.

 

문간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홑처마의 맞배지붕이며

납도리 3량가이다.

왼쪽부터 2칸은 우물마루를 깔고

고방, 부엌, 방, 대문간, 마구간, 화장실을 두었다.

 

 

 

 

성이성은 1627년 문과에 급제한 뒤

진주부사 등 6개 고을 수령을 지내고 어사에 세 차례 등용되었으며,

근검과 청빈으로 이름이 높았다.

 

훗날 부제학(副提學)을 추서받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계서 성이성은 평생 공사 구별 없이 청렴, 결백하여

검소하게 살았던 인물로 청백리는 대간 및 대신들의 추천에 의해

청렴한 관직자로서 조선시대 전 기간 중

본관 44씨족에서 219명을 배출하였는데

창령 성씨 문중은 5명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라 고대소설로 알려진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이 창령 성씨 문중 성이성으로서

실존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성이성의 유년시절과 부 성안의 관직생활,

당시의 시대적 환경과 소설의 작품내용이 모두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장면은

성이성의 현손인 성섭의 교와문고에 춘향전의 어사출두 장면과

똑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 고조께서 수의어사로 호남지방을 암행하여 안 곳에 이르니,

호남12읍 수령들이 큰 잔치를 베플어 술판이 낭자하고

기생의 노래가 한창이었다.

 

수의어사가 걸인 행색으로 들어가....지필을 달라하여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반상가효는 만성효요, 촉루낙시는 민루낙,

가성고처도 원성고라.'(동이의 술은 천사람의 피요, 소반의 좋은 아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의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성의 소리 높더라)..

이어 서리가 암행어사 출두를 소리치며 나아가

당일 파출수령 6인과 그 밖의 6인에 대한 서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시는 성이성이 쓴 시로

4대 후손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 3권>에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이몽룡과 흡사한 성이성의 행적은

계서공파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계서선생일고>, <암행록>,

<필원산어> 등의 문헌에 그대로 담겨 있다고 한다.

 

 

 

 

요즘 봉화 계서당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고대소설 춘향전의 내용은 실화이며

그 주인공은 이곳 계서당의 주인인 성이성으로

이몽룡의 실제인물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춘향전에 관한 연구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세대 설성경 교수가 최근 이몽룡의 러브스토리라는 주제로

춘향전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 성이성이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

학계는 물론 사회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곳이다.

 

 

 

 

 

하여간

사실 여부를 떠나 여러가지 문헌상의 확인으로

최근엔 도로변에도 군에서 설치한 듯한 여러 입간판들이 즐비하며,

우리가 간 그날도 주차장에 막 도착하는 서울에서 온 롯데관광의

관광버스에서 내리는 40여명의 관광객을 만날 수 있었다.

 

여러가지 정황들을 살펴본 바

우리가 알고있는 춘향전이라는 소설속의 이몽룡은

실존인물에 가깝다는 의견들이 지배적이며,

생가의 현장을 다녀온 나 자신도 그렇게 믿고 싶다.

 

인근의 영주시 이산면에 그의 묘지도 있다고 하니

다음엔 춘향전의 이몽룡 아니 계서 성이성 선생의 

묘지도 한번 다녀와야겠다.

 

이렇게

바람불어 차가운 설연휴 기간 중 

온 가족이 춘향전의 이몽룡 생가를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