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어재연 장군 생가 방문기...

금모래은모래 2012. 2. 21. 13:55

 

 

 

우리집에서 그렇게 멀지않은

어재연 장군의 생가를 다녀왔습니다.

 

어재연 장군에 대해서

기본적으로만 알고 있었지 사실적으로

알고있는 부분도 별로 없었고 그저 관심만

가지고 있었기에 꼭 한번 다녀오고 싶었답니다.

 

터 좋은 곳에 자리한

어재연 장군의 생가를 바라보면서

나름 잘 보존되고 있는것 같아 참 다행스러웠습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 12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어재연 장군의 생가는

초가집이었지만

그 규모는 상당히 큰 집이었습니다.

 

 

 

 

 

 

백과사전에서는

어재연 장군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어재연(魚在淵, 1823년 ~ 1871년)은 조선 말기의 무신이다.

자는 성우, 본관은 함종이다.

1866년 회령 부사 등을 지냈고,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어재연을 순무중군에 임명하여 광성진을 수비케 하였다.

이에 그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우세한 무기를 가진 미군에게 패했고

동생 어재순과 함께 미 해병 제임스 도허티의 총검에 찔려 전사하였다.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350년 전의 초가집인 어재연 장군의 생가는

건축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사적인 사료로 인정되어

소중하게 보존관리 되고 있었다. 

 

 

 

 

 

 

어재연 장군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어재연(魚在淵)장군은 근세 조선 말기

구미 열강에 의해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있을때

서해안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경기도 이천의 별 이다.

장군의 본관(本貫)은 함종(咸從)이며

자(字)는 성우(聖禹)로 1823년 2월

이천시 율면 산성1리에서 어용인(魚用仁)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2년 관계에 진출하여 대구영장이 되고

광양현감, 평양중군, 풍천·장단· 회령부사 등을 거쳐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나자 강화영(江華營)

진무중군(鎭撫中軍)이 되어 침공해 온 미국함대의 병력을 막게 되었다.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는

당시 급변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외면한 대원군(大院君)의

쇄국정책을 배경으로 우방 미국과 최초의 무력충돌을 일으킨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당시 조선군 243명이 전사한 치열한 전투의 주역인

어재연 장군과 어재순(魚在淳) 형제의 살신보국(殺身報國)의 정신은

나라사랑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통상 체결 요구에 대해 우리측 정부로부터

아무런 답변이 없자 미국측에서는 소함정 4척을 보내

강화도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鎭) 앞으로 들어서다가

허가없이 들어서는 이들을 저지하려고 맹렬히 쏘아대는

조선군의 포격을 받고 퇴각해 간 일이 생겼다.

평화적인 교섭의 어려움을 안 로저스 제독은

마침내 명령을 내려 4월 23일 615명의 병력을

몰래 초지포(草芝浦)에 상륙시켜 기회를 엿보다가,

이튿날인 4월 24일 바다로부터 쏘아대는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일제히 어재연장군이 포진하고 있는 광성포대를 습격하니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이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였고,

광성별장 박치성(朴致誠)은 어재연 장군의 용감한 죽음을 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전사하였으며,

천총 김현경(金鉉景), 초관 유풍노(柳豊魯), 군관 이현학(李玄鶴)등

수백명의 조선군 장졸이 침입자들을 막다가 전사하였다.

 



 

 

 

 

집앞의 연자방아와 모양석(?)...

 

원래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아니면 후에 가져다 놓았는지는

정확하게 파악이 되진 않았다.

 

 

 

 

 

 

담장에 이렇게 용마름을 올린 초가집은

좀 귀한 형태라고 한다.

 

 

 

 

 

 

 

죽음으로서 나라를 지킨

어재연 장군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를 내리고

병조판서겸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라는 높은 벼슬을 더해 주었다.

강화도에 있는 장군이 전사한 광성진은 역사의 현장으로서 잘 보존되고 있다.



 

 

 

 

 

문고리에 채워진 두개의 자물쇠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부엌 바로 옆 통풍구인 듯한 창(?)..

 

 

어재연 장군의 생가는

자 구조의 전형적인 한국형 가옥으로

전통 건축 답사를 즐겨 하시는분들에겐

정말 중요한 코스라고 한다. 

 

 

 

 

 

 

가옥의 구조적인 쓰임이라던가

다양한 형태의 초가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은 

대표적인 우리 고유의 전통 가옥임엔 틀림이 없는것 같다. 

 

 

 

 

 

 

 

담장 아래 흙바닥 틈새에서 

이상한 쇠붙이 한조각을 발견했다.

아주 오래된 듯한 쇠붙이 한 조각.....

 

예사롭진 않았다.

혹시 어재연 장군이 소실적에 가지고 놀던..

아니면 당시 이곳에서 사용되던 물건중에 하나?

 

하여간 상당히 오래된 듯한

쇠붙이 한조각을 발견하여 굴뚝 위에 올려둔 채

인증 사진만 한장 담고 그냥 왔다. 

 

 

 

 

 

 

 

문고리는 어딜가나 

우리 한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소하면서도 단아한 멋스럼이 넘쳐나며

역시나 평온한 우리네 문화라는것을 인식하게 된다. 

 

 

 

 

 

 

 

생가의 어귀에는 어재연 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도 관리되고 있었다.

 

 

 

 

 

 

 

 

충장사라는 사당이다.

 

 

 

 

 

 

 

경기도 이천시 율면 산성1리에 있는

장군이 태어난 생가 역시

이천시와 그 후손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으며,

 

지난 1973년에는 생가 언덕위에 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을 짓고 충장사(忠壯祠)라 이름하였으며

최근에는 생가(生家)를 대폭 보수하고

그 앞의 하천을 말끔히 정비하였다.

 

 

 

 

 

 

 

어재연 장군의 생가 마을 입구...

 

 

우리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장들의 화려한 전적들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서구 열강들과의 치열한 전투로

이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구한말의 장군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알려진 바가 없는것이 사실이다.

 

당시 시대적인 상황인 쇄국정책 등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었던 영향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어재연 장군의 생가를 방문하면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감회가 새로웠으며,

스스로 재조명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