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단양 신라 적성비 답사...

금모래은모래 2011. 9. 9. 11:57

 

 

충북 단양의 신라 적성비를

중앙고속도로를 지나가는 길에 가족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단양의 신라 적성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단양의 신라 적성비는 국사책에서도 배웠다시피

국보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중앙고속도로 상행선 단양휴게소에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단양휴게소에서 적성비로 가는 길은 두곳인데

오른쪽과 왼쪽 중 왼쪽으로

올라가는 길의 나무계단입니다.

 

 

 

 

 

 

단양의 신라 적성비는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 진흥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가 고구려 영토인 단양 적성일대의

영토를 편입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전승비겸 척경비이다.

 

 

 

 

 

자연석을 사용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씨가 뚜렷하다.

가로세로 맞춘 글자새김이 정교하고,

그 가운데 288자를 알아볼 수 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적성출신의 장군 등을 포상하면서

그와 같은 충성을 지역민들에게 유도하고자 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신라의 율령제도,

즉 형벌과 행정법규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

당시의 법률제도를 알수 있는 중요한 비석이다.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

『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저기 보이는 성이 바로 단양의 적성이다.

저 적성 안쪽에 단양의 신라 적성비가 보존되어 있으며,

적성 자체도 사적 제 265호로 지정 관리 되고있다.

 

단양의 적성은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토석으로 기반을 다진 후 자연석 등을 쌓아 견고하게 만들었다.

삼국시대 산성으로는 비교적 큰 규모로 약 900m에 달하나,

대부분이 무너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

 

한강을 중심으로 신라, 고구려의 세력다툼을 보여주는

비문과 토기, 기와조각과 고려시대 유물 등이 발견되었다.

신라의 축성술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현장을 함께간 대학생의 우리 큰아이가

아직도 아기들처럼 과자 부스러기를 손에 들고 있네요^^ 

 

 

 

 

 

 

 

적성안에서 바라보니 국토의 동맥인 구단양의 철도 중앙선과

국도 그리고 중앙고속도로가 한눈에 들어오더군요^^

 

 

 

 

 

 

 

 

적성은 단양 성재산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주위가 약 900m이나 대부분 붕괴되고,

북동쪽에는 안팎으로 겹쳐 쌓은 부분의 안쪽 성벽이 일부 남아있다.

성의 남서쪽, 남쪽, 동남쪽의 3곳에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성벽의 절단부가 있다.

 

북쪽은 남한강과 가파른 절벽의

자연적인 지리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다.

 

 

 

 

 

 

 

 

아내와 큰아이가 쉬고있네요...

 

 

 

 

 

 

 

1978년 성내에서 적성비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관계 변동을 알 수 있다.

비석외에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도 있어

대략 고려 후기까지 오늘날의 단양지방을 다스리는

읍성의 구실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축성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있어,

신라의 성 쌓기 기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러면 다시 백과사전을 찾아보도록 하자.

 

 

사적 제265호. 둘레 923m.

성벽은 성산(城山)의 능선부를 따라

타원형으로 말안장처럼 둘러싸여있으며,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성벽은 동벽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붕괴된 상태이다.

성은 남한강의 상류 방면으로 통하는 길과

그 하류 방면의 길,

그리고 동남쪽 및 서남쪽의 벌령(伐嶺) 방면의 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방 교통로가 모여드는 위치에 있다.

 

 

 

 

 

 

^^~~

 

 

 

 

 

 

성벽 바깥쪽의 지세는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지형은 북쪽과 서쪽이 높고 남쪽과 동쪽이 낮다.

북쪽이 급경사지이며 남한강과 인접해 있는 점으로 보아

북쪽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성이 분명하다.

 

즉 북쪽으로는 퇴로가 완전히 봉쇄된 상태이므로

고구려 성으로는 기능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적성의 정상부를 이루는

서쪽의 내성처럼 둘러쌓았던 토축 대지를

본래 백제성의 유구로 간주하고,

지금의 석축 성벽을 신라의 축조로 간주하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문터는 남쪽에 있으며

출토유물로는 백제 및 신라계 토기와 기와조각 등이 있다.

1978년 1월 단국대학교 박물관 답사단이

 단양적성비(국보 제198호)를 확인했다.

 

신라가 6세기 중반에 세운 이 비는

성 안의 정상에서 급경사를 이루며 내려오는

평평한 방형의 대지 위에 있다.

 

 

 

 

오늘은 이렇게

단양의 신라 적성비와 적성에 대해서

공부해 봤습니다^^

 

지금 창밖엔 가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한가위 명절 풍성하게 잘 보내시고

오고 가시는 길 안전운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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