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다산 정약용...

금모래은모래 2011. 9. 18. 15:53

 

 

 

다산 정약용 선생....

 

1762(영조 38) 경기 광주~ 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의 생가와 묘를 다녀왔다.

 

오늘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살아생전의 업적과

그의 실학사상 등을 찾아보고

후세에 미친 영향이 어떤것이 있는지

다같이 공부해 보도록 하자.

 

 

 

 

 

 

다산은 1762년(영조 38) 음력 6월16일

한강의 두물머리(양수리)가 한눈에 보이는 마현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행정 구역은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다.

 

능내리(陵內里)라는 지명은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불린 것이고,

마현(馬峴)은 광주분원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서

말을 타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던 고개가 있어서라 한다.

 

아버지는 진주목사 정재원 이었고,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의 고손이자 윤두서의 손녀인 해남 윤씨.
그는 22세 때 진사가 된 후 오전육기(五顚六起) 끝에 과거에 급제하여

정조 임금의 총애 아래 암행어사와 좌우부승지에 올랐다. 

 

 

 

 

먼저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자

 

목민심서 牧民心書

 "고금의 이론을 찾아내고 간위(奸僞)를 열어젖혀

목민관에게 주어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마음씀이다"라고 하여

현 국가체제를 인정한 위에서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통치의 운영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군 현의 범위에서 목민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흠흠신서

〈목민심서〉의 형전(刑典)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같이 일표이서는 저술동기와 내용에서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1817~22년에

기초, 완성되어 후기 개혁론의 대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일표이서의 개혁론은 경학사상체계와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면서 체계화되었다.

 

덕의 유무는 민심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므로 군주권의 근원은 결국 민의에 달려 있는 것이며,

천명 그 자체가 통치권의 궁극적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다산은 군주를 정점으로 한 통치질서를 회복하여

치세(治世)의 근본을 확립하고자 했지만

그와 동시에 군주의 우월성은 민의에 의해

한계가 규정된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수원성의 축조시

거중기·고륜(鼓輪)·활차(滑車) 등의 건설기계를 창안했다.

이와 함께 〈기예론 技藝論〉에서는

방직기술·의학·백공(百工)기술을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으며

원정〉에서는 수리관개사업·식수(植樹)·목축·수렵·채광기술 및

의학을 깊이 연구해야 농민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과학정책론을 제시했다.

 

 

 

 

 

 

문화관 뒤쪽 광장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 상

 

 

 

경세유표 經世遺表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하여

현재의 실행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나열하여 우리 구방(舊邦)을 새롭게 개혁해보려는

생각에서 저술했다"고 하여

당시 행정기구와 법제 및 경제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경세유표〉의 구성은 경전에서의 이념적 모델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도의 변천과정을

아울러 참조하여 개혁론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생가 뒤쪽 야트막한 산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묘소를 진입하며

한적한 나들이를 즐기시는 분들....

 

 

 

 

 

 

묘지에서 생가쪽으로 내려오며 어렵게 인증샷,,, 

 

 

 

 

 

 

다산 정약용 선생은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묘..

다산과 부인 풍산홍씨가 합장되어 있다.

비록 나홀로였지만 조용히 참배를 드리고 왔다.

 

 

 

다산은 문장과 경학(經學)에 뛰어난 학자로서

정조임금의 신임을 받았지만

정조 임금의 죽음과 함께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한많은 유배지 생활에 접어든다.

 
1801년에 불붙은 신유사옥은

겉으로는 천주교가 관련된 종교사건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벽파가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계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정치적인 사건이다.

신유사옥으로 계형 약종은 참형되고

중형 약전과 다산은 유형의 몸이 된다.

 

그 해 그는 앞서 포항 장기(호랑이 꼬리 지역)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1월 강진으로 이배된다.

이배된 사유는 천주교도 황사영이 신 유사옥의 내용을

북경에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비밀히 알린 백서사건 때문이었다.


 

그의 유배생활은 <다산신계>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1801년 겨울 강진에 유배 와서

동문 밖 주막살이를 거쳐서 동가식 서가숙하다가 4년 뒤

고성사(高聲寺) 보은산방에서 머물다가

무진년(1808)에야 지금의 다산 유적지로 왔다고 한다. 

 

 

 

 

 

 

묘소에서 바라본 여유당과 다산의 생가 모습...

 

 

당시 다산의 뒤를 돌봐준 이들은 다산의 외척인 해남 윤씨다.

특히 백련사 처사였던 윤단은

자기 소유의 자그마한 초옥을 다산에 게 주었다.

그게 지금의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이다.

 

다산은 그곳 다산 기슭에 있는 초당에서 머물며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해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로 실학을 집대성했다.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주로 관료생활의 시기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15세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이가환(李家煥)과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이미 이때부터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의 저서를 탐독했다.

 

 

 

 

 

 

 

살아 숨쉬는 역사의 현장에 잠시라도 머물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행운이었다.

 

 

 

 

 

 

다산은 30대초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관료로서

경학사상 등 학문체계는 물론 사회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암행어사를 비롯하여

금정찰방 곡산부사(谷山府使)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이를 실천해보고자 했다.

 

1799년 중앙정계에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응지진농서 應旨進農書〉의 검토를 통해 토지문제를

농업체제 전반과 연결시켜 구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이후 기본 생산수단인 토지 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고 인식하고

현 농업체제를 철저히 부정한 위에 경제적으로

평등화를 지향하는 개혁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홀로기행에서 처음 접하는 뭔가를 천천히 바라보며 연구하고

관찰하며 둘러 본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또다른 의미가 있기에

나름의 큰 매력이 있다. 

다산 생가 마당에서의 인증샷.. 

 

 

 

 

 

 

여유당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양반집 모습인데,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떠내려간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여유당(與猶堂)은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지은 다산의 당호다.

'더불다'는 뜻의 여(與)와 ‘오히려’라는 뜻으로

많이 쓰이는 유(猶)를 당호로 삼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다산의 회고록이라 할 수 있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나

여유당기(與猶堂記)에 자세히 나와 있다.

 

여유(與猶)란 말은 노자 도덕경의 ‘여혜약동섭천 유혜약외사린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에서 따온 것으로서

‘겨울의 냇물을 건너듯 사방이 두려운 듯,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에서 지었다.

여(與)는 의심이 많은 동물,

유(猶)는 겁이 많은 원숭이를 가리키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역사의 서광이던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렇듯 끝없이 자신을 경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학박물관....

 

 

 

 

 

그가 제기한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에는

 주자학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었다.

 

첫째, 주자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일리(一理)로서의 태극이 관통하고 있음을

주장한 데 비해 다산은 천도(天道)와 인간세계를 분리하여

각각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요순 3대의 제도에서 그 규범을 찾으려고 했다.

 

한편 그는 천인분리를 상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천의 존재를 별도로 언급했다.

이때 천은 모든 인간과 개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기질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배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의 능력주의는 신분제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 과거,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셋째, 욕망관[人心道心說]에서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 본 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 환경에 좌우된다고 보아

구체적인 사회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주관적 심성 문제에 치중한다거나

도덕적인 호소에 의한 해결방안을 내세우는

주자학과 대별되는 주장이다.

그는 전통적 관념론에 몰두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론적 세계관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천문·기상·지리·물리 등 제반 자연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그의 자연과학 사상의 기초는 우주관에서 비롯되는데,

전통적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논박하고

서학과 지리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원설(地圓說)에 관해 논증했다.

 

물리학적인 현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록 렌즈가 태양광선을 초점에

집중시켜 물건을 태우는 원리,

프리즘의 원리를 이용한 사진기 효과 등을 밝혀냈다.

 

 

 

 

 

 

 

또한 종두법(種痘法)의 실시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종두심법요지 種痘深法要旨〉를 저술했고,

각종 약초의 명칭·효능·산지·형태 등을 조사 검토하여

생물학적인 연구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인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개발로 연결되어

농기계, 관개수리시설 및 도량형기를 발명하고 정비했다.

또한 한강의 배다리[舟橋]를 설계하였다.

 

 

 

 

 

 

 

실학 박물관에 근무하시는 분들은 참 친절하시다.

 

다산 정약용은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 · 경제 · 역리 · 지리 · 문학 · 철학 · 의학 ·

교육학 · 군사학 ·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우리는 다산 정약용 하면 목민심서와 거중기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다산 유적지를 둘러보니

이 두 가지는 그의 단순한 업적일 뿐이고,

부패한 나라에 당당히 맞섰던 용기야 말로

진정한 그의 업적이 아닌가 싶다.

 

그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아파했으며,

관리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

더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참으로 많은걸 뉘우치고 깨우치게 하는 그의 삶이다.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모든 걸 누리며 살기보다는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했던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세대가 필요로 하는 영웅이 아닌가 생각된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다산 유적지 탐방에서의 짧은 시간은

여느 유적지 답사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침묵으로 자성하는 나만의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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