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단종의 장릉 방문길은 발걸음이 늘 무겁다.

금모래은모래 2018. 10. 23. 05:00



조선시대 제6대왕

단종이 계시는 영월 장릉을

 참 오랫만에 다녀왔다.


단풍이 물들기 직전에 다녀왔는데

몇일 사이에 금새 가을이 되어 버렸다.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장릉 입구...





장릉의 재실과 단종역사관 ...







대부분 우측의 솔밭길을 따라서

장릉을 향하는듯 해서 같은 방향을 선택했다.






아쉽게도 이곳은

운치좋은 솔밭길이지만

시멘트 포장길로 되어 있었다. 


뭔가 모르게 옥의 티라는 생각이 ... 






장릉으로 향하는 솔밭길은

단종의 애잔한 슬픔 때문인지

흔한 새소리 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끝내 거슬리는 시멘트 포장길...


뭔가 모르게 친환경적인 포장방법이나

다른 방법을 선택했으면 좋으련만..

나만의 욕심일까?





아이들 어릴때 다녀갔으니

정말 오랫만에 방문한 것 같다.


늘 지나쳐 다니면서 말이다.





사적 제196호

장릉은 비운의 왕으로 알려진

제6대 단종(1441~1457)의 능이다.


조선 왕릉은 현재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도성인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4~40킬로미터에 조영되었다.


장릉은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군에 있다.

이곳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오지로

면적은 약 353만 7,000제곱미터나 된다.


10세 때인 1450년

아버지인 문종의 즉위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문종이 왕이 된 지 2년 3개월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왕이 된다.


장릉의 상설은 정릉과 경릉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병풍석, 문인석은 있지만 무인석은 생략되었고

세자 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능역이 조성된 숙종 대에는 왕 단종이 아니라

세자 노산군이었기 때문이다.


중종 때 첫 능지 확인 후 숙종 대에 이르러

혼유석과 장명등, 석호, 석양, 망주석 등 석물을 정비했는데

작고 간단하게 만들어진 후릉을 따랐다.


명릉 이래 만들어지는 사각 장명 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인다.






단종릉인 장릉을 방문하면

늘 마음 한구석이 무겁기만 하다.

어린 나이에 그런 큰일을 당했으니...





금성대군과 같은 복위 사건이

계속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여

결국 금부도사 왕방연은 사약을 가지고

 단종이 있는 영월 청령포로 갔다.


하지만 왕방연은 차마 말을 하지 못했고

단종의 뒤에서 활시위로 목을 졸라 죽였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왕방연이 영월에 도착하자

단종은 목을 매 자진(自盡)했다고 되어 있다.


사후 처리도 비참해 야사에 따르면

시신이 청령포 물속에 떠 있는 것을 평소부터

충성심이 강했던 영월호장 엄홍도가 몰래 수습해

 장릉 자리에 안장했다고 한다.


그가 장사 지내려 할 때

주위 사람들은 후환이 두렵다며 말렸다.

하지만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며 단종의 시신을 홀로

밤에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엄홍도의 충절은 높이 인정되어

그의 자손에게 벼슬자리는 물론 추후에

공조참판이라는 벼슬도 내려졌다.


이런 예를 근거로 영월 사람들은

영월이 '충절의 고장'이라는 데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다.

또한 장릉은 향토 문화재가 거행되는 유일한 왕릉이다.






장릉의 능침은 양지바른 곳에 있어

눈이 와도 쉽게 녹으며 따뜻하다.


특이한 것은 능침을 둘러싼 소나무가

모두 봉분을 항해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졌다는 점이다.






그나마 방문객들은 제법 많았다.






솔밭길엔 정성스럽게 쌓아올린

작은 돌탑이 애절하게 소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소곳 말이다.






장릉과 관련된 안내문을

자세히 둘러보고 있는 방문객들...






영조 대에 제향 공간을 만들며

정자각과 수복방 등을 설치했고,

정조 15년(1791) 왕명으로 장릉 밑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차려놓는 배식단, 장판옥, 배견정, 충신각 등을 설치했다.


능역은 홍살문, 정자각, 단종비각,

재실 등을 갖추고 있어 여타 왕릉과 다름없다.

그러나 장릉은 능침 공간과 제향 공간이

일반 능과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장유형의 능선 중간에 능침이 있으며

능침 서측 수십 미터 아래에 평지를 이용,

L자형 참도 끝에 능침을 옆으로 하고 정자각을 배치해 놓았다.


일반적 직선형 제향 공간과 다른 형태다.

단종이 몰래 암매장되고 능침 앞이 좁아서

이렇게 된 것이다.






단종이 청령포에서 사사되자

단종의 영혼은 불교의 환생 논리에 의해

두견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단종의 유배 시 따라온 시녀들은

청령포 건너 동강 절벽에 있는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들 영혼은 단종의 유택이 있는 장릉의 능선

끝자락에 와서 단종의 영혼에 절을 하고 시중을 들었다.






영조 대에 제향 공간을 만들며

정자각과 수복방 등을 설치했고,

정조 15년(1791) 왕명으로 장릉 밑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차려놓는 배식단,

장판옥, 배견정, 충신각 등을 설치했다.






장릉의 부속 건축물인 재실...


영월의 단종릉 장릉은

두번째 방문인데도 변함없이

차분한 기운으로 둘러보고 왔다.


유일하게 강원도에 위치한 조선왕릉 장릉...


단종...

그리고 장릉...


돌아 나오면서도

무척 무거운 마음이었다.

여느 왕릉에서 느끼지 못했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