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일부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상황에서
올 가을 마지막 단풍 포스팅입니다.
계절이 하 수상하니
가을의 끝자락인지 겨울의 문턱인지
그 마저도 헷갈리는 일상입니다.
제가 유난히 정신적으로 힘들거나
어려울때 어김없이 찾아 뵙는분이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십니다.
남양주 다산 유적지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묘소에서 조용히
참배하고 주변을 거닐고 왔습니다.
입구 주차장에서 생가와
묘지쪽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노랭이 은행나무가
가장 먼저 반겨주었구요.
정약용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입니다.
정약용 선생님은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음력 6월 16일) ~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은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
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당(與猶堂) 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가 있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저서로
판결과 형벌 및 치옥(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에 관한 책으로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을
가벼이 처리하지 않도록 유의할 점을 적었다.
과거제·해세(海稅)·상세(商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 경영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준칙(準則)이 될 만한 것을 논정(論定)한 책이다.
이제는 이 풍광도 내년에나 볼수 있을것 같네요.
끝자락의 가을이지만 이곳 다산 유적지에서
맞이하는 느낌은 늘 달랐습니다.
묘소에 올라가기 직전에
다산 정약용 선생님을 먼저 뵙습니다.
저만치 소나무 숲 사이로
선생의 묘소가 자릴 잡고 있습니다.
생가인 여유당 바로 뒷편 언덕이랍니다.
가을철에 방문하는 이곳은
늘 이렇게 차분한 기분이 들더군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묘쇼앞에 홀로 섰습니다.
잠시동안 참배하며 제 자신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공직자로서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기도 하구요.
선생께서는 항상 제게
소중한 메세지를 전해줍니다.
그래서 또 다시 방문하게 되고
참배하게 되는가 봅니다.
묘소에서 바라본
생가인 여유당입니다.
알록달록한 이곳의 가을빛은
기와지붕과 어울림해서 그런지
화려한 아름다움 보다는 은은하고
수수하게만 보이더군요.
담벼락을 타는 노란 은행나무 잎새들은
제각각의 모양으로 휴식하듯 하구요.
아랫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묘소 참배 후 다시금 바라보는
선생의 묘지는 저렇게 작은 언덕위
소나무 군락에 휩쌓여 있습니다.
생가인 여유당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생가인 여유당에서는
선생의 낭낭하게 글읽는 소리보다는
무엇인가를 연구하며 몰두하는
그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여유당과
생가 뒷편 언덕위의 묘지...
밖으로 나오면서
도로변에서 거중기를 만납니다.
저 거중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정약용이 고안한 기계로
1796년 수원 화성을 쌓는 데 이용되었다.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장치이다.
정약용은 정조 때 중국에서 들여온 책으로,
1627년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 테렌즈 등이 지은
"기기도설(奇器圖說)"이란 책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개발하였다.
위에 네 개, 아래에 네 개의 도르래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밑으로 물체를 달아맨 후, 뒤 도르래의 양쪽으로
잡아 당길 수 있는 끈을 연결하여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물레를 돌림에 따라 도르래에 연결된 끈을 통해
물체가 위로 들어 올려지게 하였다.
거중기는 40근의 힘으로 무려 625배나 되는
2만 5,000근의 돌을 들어 올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거중기가 완전히 조립된 모습의
전체 그림과 각 부분을 분해한 그림이 실려 있다.
이 책에는 수원 화성 공사를 위해 제작한 기구의 종류, 수량이 나와 있는데,
거중기는 1대가 사용되었으며 왕실에서 직접 제작하여
공사 현장에 내려 보냈다고 한다.
남양주 다산 유적지에서
만난 끝자락의 노란 가을은
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고민이 많거나
힘들때 불현듯 찾아나서는 길...
다산 정약용 선생의 묘소 참배는
개인적으론 아주 의미있는 상담이자
소중한 휴식의 시간과도 같습니다.
선생의 대표적인 저서인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경세유포에서 전해주는 메세지는
오늘날의 후세들에게도 귀한 지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듯 합니다.
다산 선생님을 참배한 후에는
늘 그렇듯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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