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케케묵은 추억을 찾아 떠난 여행 병산서원...

금모래은모래 2015. 12. 9. 06:00

 

 

 

 

30여년도 더 지난

까마득한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어느 겨울날 문득 안동의 병산서원을

다녀오게 되었다.

 

인근의 하회마을과 더불어

유난히 학창시절의 추억이 많은 곳...

추억의 책갈피를 끄집어 내었지만

당시와는 또 다른 기분...

 

낙동강 휘몰아치는 물돌이의 고장

서애 류성룡 선생의 정신문화가 전해지는

병산서원의 겨울날을 무심코

거닐고 왔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저만치 우두커니 앉아 있는 병산서원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낯설어 보인다.

 

오랫만에 방문한것도 이유겠지만

뭔가 모르게 오래전의 모습과는 그 느낌이

다른것은 내 자신이 많이 변해서겠지... 

 

 

 

 

만대루(晩對樓)...

 

건축학적인 지식은 부족하지만

굉장히 웅장하고 안정감이 넘쳐나는

목조 건물인 만대루...

 

어느 누가 봐도

감탄할만할 정도의 기개가 넘쳐난다.

 

 

 

 

참 투박하다.

하지만 참 멋스럽기도 하다.

 

꾸불꾸불하게 생긴 나무의 기본틀을

잘 유지하면서도 그 오랜세월을

저토록 늙어가는가 보다.

 

그러고 보면

웅장한 만대루의 매력은

이 기둥이 대신 말해 주는 느낌이다.

 

 

 

 

사람과의 조화로움도 자연스럽다.

 

 

 

 

병산서원....

 

백과사전의 도움을 받아보자.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다.

1572년(선조5)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 것이다.

 

1607년 서애가 타계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광해군5)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여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20년(광해군 12)에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1629년(인조 9)에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으며,

그의 셋째 아들 류진(柳袗)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3년(철종 14)에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보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 졌다.

매년 3월 중정(中丁:두 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사적 제 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만대루의 뒷모습...

 

오래전 방문에선 이렇게 자세히 둘러보질 않고

대충보고 강가에서 놀기만 했던것 같다.

 

늙은 기둥과 달리

깔끔해진 기와가 오히려

어색해 보이기도 했다.

 

 

 

 

병산서원의 강당인 입교당...

 

우측이 교장실 역할이라면

좌측은 교무실의 역할이었다고 한다.

 

 

 

 

어느 서원에서나 쉬이 접할 수있는 동재와 서재...

얼핏 보기엔 닮은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뭔가 모르게 다른 느낌이다.

 

 

 

 

그동안 서원에 대해서 수박 겉 핥기식으로

얇게 공부를 해 왔기에 건축물의 기본구조와

용도를 모두 이해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병산서원에서는

주변 풍광과 잘 조화된 풍수지리적인

측면이 유난히 돋보이는듯 하다.

 

물론 전문가적인 해석이 아닌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수십곳의 서원을 둘러본것 같지만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겉모습만 챙기기 일쑤였다.

 

그나마 겉모습마저도

제대로 못본곳도 있으니 말이다.

 

 

 

 

병산서원은

개인적인 추억의 실타래를

풀어가면서 다시금 방문했지만

선비의 낭낭한 글읽는 소리를 기대했던

허망한 꿈인양 아쉽기만 했다.

 

스마트폰을 들고가서

선비의 글읽는 소리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짓을한 것 같은...

 

 

 

 

사당앞을 지키는 베롱나무는

어렴풋이 기억속에서 재생되었다.

 

그때는 봄철이었던것 같은데

나무의 정확한 정체도 몰랐던 기억이다.

 

 

 

 

수령이 무려 380살이라고 하니

할배나 할매나무인건 확실한것 같다.

 

비록 화려한 꽃은 다 지고 없었지만

베롱나무 특유의 매끄러움과 재질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 그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장판각...

 

 

 

 

드리운 베롱나무를 배경으로

강당의 뒷태를 슬그머니 훔쳐보았다.

 

 

 

 

사당옆엔 제사를 준비하던 전사청이 있다.

앞쪽의 부엌 역할을 하던 주소에서 음식물이 준비되면

이곳 전사청으로 옮겨 제사 준비를 했다고 한다.

 

 

 

 

담을 타는 담쟁이의 흔적에서도

녹슨 기왓장이 아닌 제법 최근의 기왓장인듯 했다.

나름 운치는 있었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전사청에서 바라본 주소의 뒷태...

주소의 지붕도 여전히 베롱나무가 포근하게

껴안고 있는 형국이다.

 

 

 

 

서원의 생활을 책임지며 부엌 역할을 하던 주소(廚所)

 

그러고 보니

병산서원 포스팅은

블로그에서 처음인것 같다.

 

 

 

 

주소 앞에는

달팽이 모양의 화장실인

뒷간이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다.

 

 

 

 

두손 꼭 잡고 서원을 거니는

젊은 연인의 모습에서 빙그레 웃어 보았다.

그냥 보기 좋아서^^

 

왠지 모르게 사적이나 오래된 문화재 등지에서

젊은 연인들을 만나면 무척 반갑다.

 

 

 

 

 

병산서원...

 

 

인근에 위치한 하회마을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후 더 많은이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하회마을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갔다면

이곳 병산서원엔 퇴직한 후 미국 부시 대통령이 2005년도에

다녀갔다는 증표가 작은 소나무 한그루에 남아 있었다. 

 

 

그나마 이번 추억여행에서는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한가지가 있었다.

거의 2km 정도의 비포장 진입로다.

물론 그렇게 험하진 않다.

 

 

마을 어르신들이 불편해 하실만도 한데

비포장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해준

병산리 마을분들이 고마웠다.

 

 

언제 다시 방문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케케묵은 추억을 찾아 떠난 이번 여행에서는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김 할 수 있는

아주 귀한 추억으로 남을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