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삼국시대의 발자취 하남 이성산성의 가을을 거닐다...

금모래은모래 2015. 11. 17. 06:00

 

 

 

 

사적 제422호

하남 '이성산성'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주말 시간에 하남에 갔다가

볼일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겨우 짬내어

이성산성 전체가 아닌 일부를 맛뵈기로 겨우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하남의 새로운 문화재를 추천해 주신

블친 '미리별'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변의 남한산성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또 하나의 사적지인 이성산성을

새롭게 공부하게 되고 알게되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가을빛이 조금은 남아 있어

그나마 산책하듯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인

이성산성의 일부분을 사진 몇장으로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성산성 입구입니다.

주차장이 구비되어 있지 않아

산성 입구에 대충 주차할 수는 있더군요.

 

 

 

 

하남 이성산성?

 

평소 잘 몰랐던 산성이다.

주변의 남한산성만 알고 있었는데

그러면 백과사전의 도움을 받아 보았다.

 

하남 이성산성(河南 二聖山城)은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있는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2000년 9월 1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22호로 지정되었다.

 

성 둘레 길이는 총 1925m이며,

11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일부 복원되었다.

 

한강 유역에 위치해 있어서 남한산성, 검단산성, 아차산성, 대모산성, 대모산토성,

우면산성, 옥녀봉토성, 삼성동토성 등의 성을 조망하며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축조 후 200∼300년가량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산성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북쪽방향으로 내려오는

줄기와 만나 길게 맥을 형성하는 금암산의 줄기에 접해 있으며,

남쪽은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작은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지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산성은 배후의 평야지역을 방어하고

강북의 적으로부터 한강유역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춘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총길이 1,925m인 이성산성과 성내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한양대학교박물관의 주관으로 지난 '86년부터 '99년간 7차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삼국시대 건물지(8각, 9각, 장방형 등)와 부대시설(문지, 배수구 등), 목간,

철제마 등 총 3,352점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특히 3차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목간 전면의 명문기록

「무진년정월십이일 붕남한성도사< 戊辰年正月十二日 朋南漢城道使...>」 중

"무진년"은 603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된 토기들은 황룡사, 안압지 출토 토기들과 유사하여 통일신라토기로 판명되며,

신라가 5세기 중엽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축조된 것으로

역사상·학술상으로 매우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오르면서 몇분을 만났습니다.

수복하게 쌓인 바닥의 낙엽이 멋지더군요.

 

 

 

 

오르면서 좌우의 늦깍이 단풍도 제법입니다.

 

 

 

일단 험한 코스가 아니더군요.

 

 

 

다소곳이 오르는

둘 부녀의 모습이 너무 이뻤습니다.

 

 

 

 

노랭이들도 보이구요^^

 

 

 

 

1차 갈림길이 나오더군요.

 

 

 

 

저만치 뭔가 이상한 성의 흔적이 보입니다.

이성산성 그 흔적앞에 서다...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축성 기법과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신라가 6세기

중반경에 처음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차 저수지에서 출토된 합(盒)과 짧은굽다리접시 등은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유물과 매우 비슷하다.

황룡사는 553년부터 조성되었는데,

이 때 신라는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신주의 치소는 광주 일대로 추정되는데,

그 치소성이 이성산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성벽과 저수지, 건물터 등에 축조 시기의 차이가 확연히 나타나고,

출토 유물도 시기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7세기 후반~8세기 초반에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고려 초기의 청자 조각이 약간 보일 뿐이어서,

고려 초기 이전에 산성의 기능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안에서는 다수의 건물터도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발굴된 것만 11기이지만, 주춧돌이 노출되는 등

건물터가 확실한 것을 포함하면 최소 20기 이상의

대형 건물이 자리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건물은행정·의례의 기능에 맞추어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두 차례에 걸쳐 축조된 저수지 3곳도 확인되었다.

1차 저수지는 처음에 성벽을 쌓았을 때 타원형으로 만들었지만,

2차 저수지는 1차 저수지 안을 파낸 다음 네모나게 쌓아 만들었고

석축 바깥에는 2m 두께로 점토를 다져 물이 새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밖에도 3곳의 저장 구덩이와 4곳의 의례 유구도 확인되었다.

의례 유구는 건물의 주춧돌이나 주춧돌 주변에

큰 돌을 놓고서 주변을 잔돌로 쌓은 구조로,

그 가운데 1기에서는 17마리에 해당하는

토제마(土製馬)와 철제마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1차 저수지의 늦가을 풍광입니다.

 

 

 

 

 

 

산은 낮은 편인데 이런 우물이 있더군요.

산성으로서의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삼국시대의 귀한 유적지를 거닐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이성산성은 완전한 토성도 아니고

석축과 토성의 혼합형인듯 보였습니다.

 

 

 

 

 

 

 

 

 

이성산성은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으로

진출한 뒤에 설치한 신주의 치소성이었으며,

이후 한산주(漢山州)의 치소성으로 활용되면서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과 지방지배 체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성벽과 저수지, 건물터 등에

여러 차례 고쳐 쌓은 흔적이 뚜렷하여

성곽 축성 방법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울러 출토 유물에도 제작 시기의 차이가 드러나 있어

당시의 생활과 예술, 의례, 풍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제법 모양을 갖춘 산성이었습니다.

 

오래되어 그 흔적들이 많이 사라져서

아쉬움은 남지만 말입니다.

 

 

 

 

 

이곳까지 다녀오질 못하고

이성산성의 관련자료를 옮겨보았습니다.

 

 

 

 

 

뒤늦게나마 발굴이 되고

사적으로 지정되어 다행인듯 합니다.

 

 

 

 

 

사실 산성의 전체를 둘러보려 했는데

여러가지 사정상 일부만 보고와서 아쉬웠습니다.

 

 

 

 

 

 

 

그나마 끝자락의 단풍들이

여기저기서 반겨주는 분위기였습니다.

 

 

 

 

 

 

 

 

 

이성산성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도 알고서 바로 방문해 보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이렇게 또 하나의 사적을 알게되고

직접 방문까지 하게 되었으니

금상첨화였습니다.

 

 

산성 규모자체가 그렇게 크지않기 때문에

다음번 방문땐 꼭 산성 전체를 둘러봐야겠습니다.

 

 

하남 이성산성의 전부가 아닌 일부의

가을빛 나들이를 두서없이

둘러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