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고려시대 배흘림 기둥의 정통 강릉 임영관 객사문...

금모래은모래 2014. 1. 14. 06:00

 

 

 

오늘은 강릉 임영관 객사를

사진 몇장으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객사는 옛날 중앙에서 오는

관리나 내빈을 대접하고 묵게하던 시설인데

강릉의 객사는 그 흔적만 남아 있다가

복원된 시설이 대부분입니다.

 

국보로 지정된 객사문만이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전해주는듯해서 다행스러웠습니다. 

 

 

 

객사를 들어가기 전에 저만치 칠사당이 먼저 보인다.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인 칠사당은

대도호부사가 주재하던 조선 시대 관공서로

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속에 관한

일곱 가지 정사를 베풀던 곳이라고 한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인조 10년(1632년)에 중건하고, 영조 2년(1726년)에 중수했으며,

고종 3년(1866년)에는 진위병(鎭衛兵)의 영으로 쓰이다가

이듬해 화재로 타 버린 것을 강릉 부사

조명하가 중건했다고 한다.

 

 

 

 

 

 

 

 

오늘도 죽지 않아

                                         -강릉 동헌에서- 

 

                                 - 김 영 수 -

 

         안으로 들어가야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것입니까
          죽음 속에서 내다보며
          하늘을 숨 쉬었던 이들
          나는 오늘도 죽지 않아
          삶에 닿지 못하고
          쓸쓸히 옛 동헌 앞마당 서성입니다
          소매 끝으로 들어오는
          싸한 슬픔의 꿈에서
          황급히 날아 뜨는 나의 기도
         '거룩한 죽음 허락하소서' 는
          정녕 구름 뚫을 수 있을까요
          내 지금이라도
          가난한 이들 마당에 들어가
          목마름으로 설렐 수 있다면
          멀리 푸른 숲 속에서 휘어지고 있는
          흰 폭포도 환히 보는 것입니까

 

 

 

강릉 객사 삼문...

 

강릉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세워진 목조건물로

그 무게있고 두터워 보이는 아름다움과 섬세한 솜씨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인정되어,

국보 제51호로 지정되었다.
 

처음 지어질 당시, 객사의 이름은 임영관이었다.

지금의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서 쓴 친필이다.

 

객사문은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 

그 중후미와 구조의 정교함은 우리나라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드문 건축물이다.

 

또한 기둥의 배흘림은 그 어느 건물보다도  심하며, 
전체적으로 볼 때 아주 오래된 인상을 주며

장식화 경향이 심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수덕사 대웅전(국보제49호, 1308년건립)보다

건축연대가 앞선다고 한다.

 

현재는 객사문만이 남아 있다. 

일반 사찰이 아닌 목조건물로는

이 객사문이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국보 51호 '강릉객사문'은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보다

배흘림이 더 두드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무가 자라는 방향을 지붕 쪽에 두고

뿌리부분을 초석부분에 두니 자연히 위쪽이 더 홀쭉하다.

착시현상을 고려해서 일부러

곡선을 더 강조한걸까?

 

 

 

 

 

 그동안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국보 건물 6개 가운데

영천 영산전을 빼고 5개를 둘러보았다.

앞으로 기회가 또 있으리라...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국보는 어떤것이 있을까? 

 

영천 거조암 영산전(국보 제14호)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부석사 조사당(국보 제19호)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

강릉객사문(국보 제51호)

 

 

 

 

 

복원된 임영관...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건물 중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정전(正殿)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오면 여기서 묵게 하였다고 한다.

 

 

 

 

 

저기 보이는 현판‘臨瀛館(임영관)’이라는 관액(館額)은

1366년(공민왕 15) 왕이 낙산사 관음에 후사를 빌기 위하여

신돈(辛旽)과 그의 시종으로 후에 공민왕의 후궁이 되는 반야(般若)를 데리고 왔다가

비에 막혀 강릉에서 10일간 머무를 때 썼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는 이 터에 학교 건물을 지어

이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2006년 국보 제51호 객사문을 비롯해

전대청, 중대청, 동대청, 서헌 복원사업이 완료됐다.

이와 함께 2007년부터 관아지(내아 동헌 등) 복원 등

2차 사적지 공원 조성 사업이 시작되었다.

 

 

 

 

고려시대 국보 건물 중

가장 많이 고쳐진 건물이 강릉 객사이다.

 

그러나 강릉 객사문이 남아 있음으로써

강릉객사 임영관 등 관아 건물이 복원 되었으므로

고려시대 건축물 국보로서 가장 많이 공헌한 건물이라 한다.

 

 

 

 

이렇게 강릉의 관아지와

임영관 객사를 휭하니 둘러 보았습니다.

 

그 시대의 옛 건물은 온데간데 없고

오직 하나 남은 국보로 지정된 객사문만이

당시의 아련함을 귀히 전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나마 새로이 복원된 강릉의 객사는

강릉시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많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것 같았습니다.

 

복원된 강릉 객사와

오래도록 변함없이 그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고려시대 건축물인

국보 제51호인 강릉 객사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