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차게 여름비 내리던 날
어딘가로 기차여행을 떠나던 큰아이를
원주역에 살포시 내려주고,
원주시내에 위치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13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원동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이곳을 방문하였을 당시에도
빗줄기는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왕 방문했는거 휭하니 둘러 보기로 하고
성당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습니다.
입구의 주차장에서 걸어 들어가 봅니다.
원동성당에 대해서 찾아 보았습니다.
천주교 원주교구 주교좌 본당.
본래 명칭은 원주(原州) 본당이었으나 1957년 6월 1일
원주시 학성동에 본당을 분할하면서 원동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8월 17일 풍수원(豊水院) 본당에서 분리 · 신설되었으며,
주보는 천주 은총의 모친.
부엉골 본당의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는
1895년에 본당을 장호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면서,
그렇게 되면 풍수원과의 거리가 멀어져 서로 방문하기가 어려워지므로
그때 풍수원 본당의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루도비코 신부와 의논하여
원주에 본당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르 메르 신부는 1896년에 원주 군청에서 가까운
원주읍 상동리(현 가톨릭 센터 자리)에 소재한 대지 350평과
기와집 16칸을 매입한 뒤 그 해 8월 17일 풍수원 본당을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맡기고
원주(현 원동 주교좌)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본당 설립 당시 관할 공소는 20개였으며, 교우 총수는 1,137명이었다.
원주 읍내에는 몇몇 신자들만이 있었고,
대부분의 교우들은 공소에 있었기 때문에 르 메르 신부는 주로
공소를 순방하면서 사목하였다.
이와 같이 공소를 순방하는 데는 보통 한 달이 걸렸다.
원동 성당은 건축사적으로 돔형 종탑의 독특성과
양호한 보존상태 그리고 1970년대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 등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12월 31일 대안리 공소(등록 문화재 제140호)와 함께
근대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서종태,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에서 발췌]
확실히 특이한 양식은 맞는것 같다.
여타 다른 성당에서 볼 수 없는 그런 건축물이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139호...
1954년에 건립되었다고 되어 있다.
붉은 벽돌의 몇몇 성당 보다는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 양식과 보존 상태가 유난히 뛰어난 듯 하다.
아름다운 속삭임...
콘크리트 건축물 사이의 창문틀 등이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했다.
누군가 안에서 기도하는 듯...
살그머니 열려진 출입구로 들어가 보자...
그분에게 방해되지 않게 뒤꿈치를 들고..살금살금..
단 한분이 계셨다.
다른 지역의 성당에서 보았던
좌우의 기둥이 안 보인다.
원동성당의 특징인가?
실내에서 바라보는 잠겨진 주출입문의
아름다움에 시선이 고정된다.
단아한 자태...
외형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내면적인 의미가 크다고 하는 원동성당...
콘크리트 벽이 전해주는 이야기...
오래된 것이 좋다고 누군가 그러더이다.
요소요소에서 그 흔적들이 조금씩 보이더군요.
원동성당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찾아 보았습니다.
원동성당은 유신 치하인 1974년 초대 교구장
지학순 주교(1965∼1993년 재임)의 구속을 계기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부상한다.
지학순 주교가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74년 6월 중앙정보부에 강제 연행된 사건은 전통적인 신심만 강조하던
한국교회가 이후 방관자적인 자세를 버리고
사회 정의 구현에 앞장서는 데 기폭제가 된 사건이었다.
지 주교의 적극적인 행동에 자극을 받은 전국 각지의 사제 300여명이
그 해 9월말 원동성당에서 모임을 가진 후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한 것은
국민들에게 원동성당을 민주화의 요람으로 인식하게 하는 결정직인 계기가 된다.
사제단이 인권회복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지 주교 석방을 촉구하는 가두 시위를 벌이는 등
‘실천하는 신앙’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곳이 바로 원동성당이었던 것이다.
당시 초미의 관심을 끌던 지 주교의 구속과 맞물려 그가 교구장으로 있는
원주교구의 주교좌 원동성당은 자연스럽게
민주화의 요람으로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원주의 원동성당을
작지만 차돌같이 단단한 '신앙의 주춧돌'이라고 부른다.
강원도 원주시 원동 언덕에 자리잡은 원주교구 주교좌 원동(園洞)성당.
언뜻 보면 그다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소박한 성당일 뿐이지만
지난 100여년간 강원도 지역 선교의 요람으로,
특히 70년대는 반독재 투쟁의 불씨를 지피며 민주화 운동의 기수가 되기를 자처했던
원동성당이 한국 교회사에 써온 이력은 결코 녹록치 않다.
작지만 차돌같이 단단한 원동성당은
규모가 아닌 내실로 따지자면 어느 교구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원주교구와 닮은 꼴이다.
시계탑의 시간이 내 손목시계랑 정확이 맞다..
넉넉한 공간이 아니어서 카메라로
담아내기가 상당히 어려웠지만
다양한 자세로 담아 보았다.
한켠을 지키는 코스모스의 청순함이 유난스럽기도 하고...
아직도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다.
물론 여름날 토해내는 빗줄기를 즐기는
성당 마당의 꽃도 있었다.
원동성당에서는 기존에 다녀온 다른 지역의 몇몇 성당에서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감성들이 발동되었다.
그렇게 웅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역사의 한 현장에 우뚝선 듯한 자신을 발견했다.
음성 감곡의 매괴성당과 아산의 공세리 성당
그리고 원주 용소막 성당과는 분명 차별화 되는 그 독특한
건축 양식이 방문객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혹자들이 70년대 민주화의 요람이라 칭하는
원주의 원동성당 방문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모습으로 오래도록
잘 보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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