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서서히 한해를 마감하고 있는 폐사지 고달사지...

금모래은모래 2012. 11. 22. 10:13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1 일원의

사적382호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세워진

고달사지를 다녀왔습니다.

 

고달사지는

고려 광종이후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절로 성장하였으나 언제인가 문을 닫았는데

그 시기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고달사지의

늦가을 정취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입구의 도로변엔 이런 콩깍쥐가 방문객을 반겨주네요.

 

 

 

 

 

주차장 곁 거목의 느티나무 아래 나무 의자에서

스마트폰을 즐기고 서서히 들어가 봅니다.

 

 

 

 

 

경내에는 고달사지 승탑 (국보 제4호),

석대좌 (보물 제8호),원 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보물 제6호),

쌍사자석등 (보물 제282호)은 國立中央博物館에 있다.

 

 

 

 

 

신라 경덕왕 23년(764) 창건 후,

고려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비호(庇護)를 받은 大刹 이었으나

언제 廢寺가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함.

 

신라 때 세워지고

고려왕실의 비호를 받은 대찰이

어이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까요?

 

 

 

 

 

여주 혜목산 고달사지(驪州 高達寺址)에는

지금은 모두 폐허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당대 사찰의 규모를 알려주는

많은 석조유물들이 남아있다.

 

 

 

 

 

고달사 석대좌 보물 제 8호

 

경내에는 고달사지 승탑 (국보 제4호),

석대좌 (보물 제8호),원 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보물 제6호),

쌍사자석등 (보물 제282호)은 國立中央博物館에 있다.

 

 

 

 

 

원종대사혜진탑비의 이수와 귀부 보물 제6호..

 

섬세함이 고려 불교 미술의 극치를 보여줌

고달사지에 세워져 있는 비로,

원종대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달사지 부도와 비좌 및 이수,대좌 등은

고려초의 석조미술 최대 최고의 걸작품이라 함.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으며,

비몸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으로 옮겨져 진열되어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다.

 

 

 

 

 

별장을 닮은 현재의 고달사 모습입니다.

 

 

 

 

 

대찰의 그날을 꿈꾸는 것일까요?

 

 

 

 

 

어인 제주의 귀요미 하루방이 보이구요.

 

 

 

 

 

혜목산에서 흐르는 시원한 생수 한모금을 마셨습니다.

 

 

 

 

 

혜목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 입구...

 

 

 

 

 

어색한 조화...

 

 

 

 

 

고달사지 귀부

 

그냥 지나치고 쉬우면서도

가장 작고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으나

보면 볼수록 친근한 정이 가는 귀부..

이름도 호적도 없는 귀부...

 

 

 

 

 

지나온 고달사지를 내려다 봅니다.

 

 

 

 

 

이제 국보 4호를 관람하러 살짝 야산으로 올라가 봅니다.

 

 

 

 

 

67m 정도 올라가니 뭔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고달사지 승탑(부도) - 국보 제4호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 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 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돌에 꽉 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몸 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 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이 얼마나 자세가 안정적입니까?

볼수록 감동입니다.

 

 

 

 

 

당시의 기술로 이렇듯 화려한 문양을

돌에다 새겨 넣었으니...

 

 

 

 

 

국보 4호인 고달사지 승탑(부도)은

나름 잘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 보물 제7호

 

넓은 절터 안에 많은 석조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 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이 탑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래 받침돌을 네모반듯하게 짰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가운데 받침돌의 조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 하지만 좋은 비례를 보여준다.

 

현재 아랫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어

섬세한 관리가 요망된다. 

 

 

 

 

 

해를 품은 탑인 해품탑을 만들어 보고...

 

 

 

 

 

이제 서서히 발길을 돌려 봅니다.

목장을 닮은 듯한 분위기...

 

 

 

 

 

제가 지나온 길을 다른 가족이 오르고 있습니다.

 

 

 

 

 

이곳에도 아직은 가을이 묻어나고...

 

 

 

 

 

여주의 고달사지는 개인적으로 집에서 가까워

가끔 홀로 답사를 하는 곳 중 한곳이지만

발굴 이후엔 이렇게 단장이 잘 되어 있어

참 다행스런 생각이 든다.

 

 

 

 

 

 

여주의 고달사지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근간에 발굴작업 이후 새롭게 잘 정리되어

관심있는 분들의 발길들이 이어지고 있다.

 

고달사지...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이제까지 다섯번 정도의 답사를 거치면서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갈때마다

조금씩 관리가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지금은 폐사지지만

그 보존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문화재들이

즐비한 여주의 고달사지의 늦가을 정취를 둘러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