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여주 보통리 한옥 김영구 가옥과 해시계가 주는 의미...

금모래은모래 2012. 7. 18. 06:00

 

 

오늘은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남쪽 방향의 언저리에 자리잡고 있는

귀한 한옥 한채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마을 이름도 특별하지 않은 '보통리'랍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2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여주의 '김영구 가옥'입니다.

 

 

 

 

 

김영구 가옥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가옥.

창녕 조씨 집안이 대대로 살던 가옥이다.

기와로 지붕을 잇는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영조 29년(1753)에 세워졌음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 조병희가 독립군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면서 이 집도 매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은 튼 ㅁ자형 구조로

ㄷ자형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

작은 사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안방과 대청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부엌과 건넌방, 광이 ㄷ자로 꺾여 있다.

一자형 큰 사랑채에 1칸짜리 누정이 돌출되어

붙어 있어 사랑채에 운치를 더한다.

건물의 각 부재가 매우 단정하게 마감되어 있어

정갈한 느낌이 드는 가옥이다.

 

집을 지은 시기가 비교적 분명하고,

훈련된 목수가 기법에 따라 정성껏 지은 격조 높은 집이

여주라는 작은 고을에 존재한다는 점에서도

학술적인 가치를 지니는 주택이다.

 

- 문화재청 발췌 -

 

 

 

 

 

김영구 가옥은 1999년 5월 13일 개와(蓋瓦) 수리 공사중에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삼계유(三癸酉) 이월(二月) 이십칠일(二十七日)

사시(巳時)상량(上樑) 임좌(壬坐) 병향(丙向)”이라는 상량문이 확인되었다.

 

이를 서력(西曆)으로 환산하면 1753년(영조 29)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 년 전에 지어진 경기도 동부지역의 전형적인

사대부(士大夫) 가옥임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안마당에는 다른 곳에서는 쉬이 찾아보기 힘든

해시계(경기도 민속자료 2호)가 덩그러이 놓여 있다.

 

해시계는 원래 사랑채 앞에 있었는데

누군가 훔쳐가려 한 후 안채로 옮겼다고 한다.

덩그렇게 놓여 진 돌이 무슨 해시계냐고 하겠지만

돌 위에 별도의 장치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일반 주택에서

해시계는 처음 보는것 같다.

 

 

 

 

 

높이는 76㎝이고,

수평면의 너비는 25㎝이다.

제작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가옥이 건축된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조식이 없고,

수평면에 2자 정도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심하게 마멸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해시계는 세종 16년(1434) 왕명으로

장영실(蔣英實)이 태양의 일주운동을 이용,

그림자의 방향에 따라 대략의 시간을 알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그 종류는 여러가지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주 보통리 해시계는 지금 남아 있는 상태만으로는

어떤 해시계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정사각형의 돌 한가운데에 지름 4㎝, 깊이 1㎝의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 간단한 영표를 세워 그림자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태양의 높이와 방향을 알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가옥의 구석 구석엔 제비집이 즐비하다.

사람사는 향기가 무척이나 정겨운 모양이다.

 

 

 

 

 

 

김영구 가옥이라는 명칭은

현재 집주인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집의 경우 문화재 명칭을 정할 때

지정 당시 살고 있던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집의 내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현재 문화재청에서 명칭을 다시 정리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안채의 마당엔 아름다운 꽃들이 있어

현재도 누군가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르신 두 내외분께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마루에서 쉬고 계셨다.

김영구 어르신인가 보다.

 

"집 사진 찍으러 오신거요?" 라고 하셨다^^

 

 

 

 

 

 

주춧돌과 마루 등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벽돌 등이 조금은 개조된 듯 하였지만

안채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당이 참 넓고 화사한 꽃까지 피고 있어

한옥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전해지기도 했다.

 

 

 

 

 

쌓아올린 돌들의 다양성이

살면서 중간에 개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채에서 바깥쪽을 바라보니

대문의 문고리가 그저 정겹기만 하다. 

 

 

 

 

 

창녕 조씨 집안도 당시엔

위세가 대단하였던 집안이라고 한다.

이 집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 조석우는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조석우의 고조부였던 조하망은 강릉부사와 승문원부제조를 역임하였을 정도로

그 당시엔 정말 대단한 집안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래쪽의 붉은 벽돌이 왠지 모르게 어색해 보임은

한옥의 정체성 때문일까?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징 중에 하나는

작은 사랑채가 건넛방 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작은 사랑채의 뒷쪽에도 툇마루가 있고

건넛방 뒤쪽에도 툇마루가 배치되어 있다.

 

 

 

 

 

 ‘김영구 가옥(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26호)’의 명칭을 둘러싼

논란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지난 1984년 1월1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김영구 가옥’은

당시 소유자인 김영구씨(74) 이름으로 문화재 명칭이 지정된 이후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그대로 사용돼 오고 있다.


 

군 관계자는 "문화재 지정 당시 소유자 이름을 인용하였으나

지속적으로 문제점이 제기되어 문화재청에 ‘여주 조판서 고택’으로

지정 명칭 변경을 신청하였으나 누락됐다”고 말했다.


한편 문화재청 관계자는

“여주군이 ‘김영구 가옥’의 지정명칭 변경을 신청했으나

예고 기간 중 소유자(김영구 씨)가 반대 의견을 냈다”며

“김씨 사는 집에 왜 조씨 문패를 붙이려 하느냐는 김영구씨의 강경한 반대로

명칭 변경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일반 서민들의 가옥이 아닌

사대부 집안의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구조들이 속속 눈에 들어온다.

 

 

 

 

 

 

마당 한켠에서는 때늦은 능소화가 

그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한옥의 화려함이 극치를 달린다.

너무 멋지다.

 

 

 

 

 

건물의 앞에서 보면 왼쪽에 있는 출입문인데

원래의 대문은 아닌듯 하다.

 

 

 

 

 

 

새로 지어진 듯한 건물 뒷편의 창고형 건물들..

 

 

 

 

 

기왓장 아래 담장을 지키고 있는

보랏빛 도라지를 이곳에서도 만날 수 있어

그저 반갑기만 하다.

 

 

 

 

 

 

250여년 전에 지어진 고택이지만

현재 거주하고 계시는 분이 있어 상당히 조심스레

발길을 들여 놓았지만 의외로 덤덤하게 맞아 주시던

두 어르신께 감사드리고 싶다.

 

나이가 많은 우리네 한옥...

나름 잘 보존된 우리네 한옥...

집안에 해시계가 있는 특별한 가옥...

다양한 구조의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전통가옥이라 칭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집주인과 원래의 집주인을 떠나

후손들의 입장에서 그저 잘 보존되고 관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 여주의 '김영구 가옥' 방문은

문득 잊혀지기 쉬운 우리 한옥에 대한 새로운 견해와

소중한 우리 문화 유산에 대한 되새김의 시간이 된것 같다. 

상당히 의미있는 방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