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아동문학의 거장
고 권정생 선생님이 살아생전에
오랫동안 집필하시던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의
흙으로 만들어진 집을 다녀왔습니다.
마을의 주차장에서 만난
커다란 간판(?)
한국을 대표하는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님...
조탑리 마을 조감도입니다.
다양한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 숨쉬는
아주 평온한 마을이었습니다.
고 권정생 선생님이 집필하시던
흙집으로 진입하는 마을 골목의 담장과
담쟁이의 단아한 모습입니다.
아동문학가 권정생 그는 누구인가?
권정생(1937. 9. 10 ~ 2007. 5. 17.)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가난한 노무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청송으로 귀국했으나
빈곤과 6·25전쟁 등으로 곧 가족들과 헤어졌다.
그는 대구, 김천, 상주 등 객지를 떠돌며
나무장수, 담배장수, 가게 점원 등
온갖 일을 하다가 폐결핵, 늑막염 등의 병을 얻어
1957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으로 돌아왔다.
병이 깊어져 신장결핵, 방광결핵 등으로
전신에 결핵이 번져 생사를 넘나드는 가운데
더욱 그리스도교에 의지하게 되었다.
집안 형편으로 1965년 집을 나갔다가
1966년 다시 들어와 마을의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종지기가 되었다.
떠돌이 생활 중에도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써왔으며,
건강이 호전되고 교회 문간방에 정착한 이후부터
작품을 발표하였다.
베스트셀러 작가된 된 이후에도
1980년대 초 교회 뒤 언덕에 지은
작은 흙집에서 살면서 검소한 생활을 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권정생은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똥〉을 발표하여
동화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강아지똥〉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생명이
자기 희생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고,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장편으로는 대표적으로
1984년 출간한 〈몽실 언니〉를 들 수 있다.
텔레비전 프로에서도 상영된 바 있다.
저서로는 동화집으로 〈강아지똥〉·〈사과나무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몽실언니〉·〈점득이네〉·〈밥데기 죽데기〉·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한티재하늘〉·〈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무명저고리와 엄마〉·〈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깜둥바가지 아줌마〉 등이 있고,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수필집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우리들의 하느님〉 등이 있다.
도로변에서 잘 안보이는 나즈막한 곳...
작은 집 한켠에
나보다 먼저 누군가 와 있었다.
안동의 경안여중생 몇명과
선생님들이 문학기행을 온 듯하다.
선생님이 살아 생전에 사용하시던
마당 한켠의 화장실...
사람들은 권정생을 밀리언셀러 작가로 기억하지만
산문집에 비친 그의 삶에는 힘든 생활과 뼈아픈 질병밖에는 없었다.
19세에 발병한 결핵이 신장, 방광을 넘어 전신 결핵으로 이어졌다.
겨울밤의 고통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적었다.
“소변보기가 어려워졌다. 10분, 5분으로 변소에 드나들어야 했다.
아예 깡통을 기도하는 옆에다 갖다 놓고 밤을 새웠다.
어느 사이에 ‘어이 추워, 어이 추워’로 바뀌어 버린다.”
지쳐 까무룩 잠이 들어 깨보면 어느새 온통 바지가 젖어있었다.
새벽에 우물에 가서 손수 바지를 빨며, 고인은 서럽게 울었다.
가난한 집의 부담을 덜어주려 집을 떠난 고인은
3개월 동안 구걸을 하며 보내기도 했다.
현실은 참담했지만 문학만은 아름다웠다.
거 지
권 정 생
거지를 만나
우리는 하얀 눈으로
마주 보았습니다
서로가
나를 불행하다 말하기 싫어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삶이란
처음도 나중도 없는
어울려 날아가는 티끌같이
바람이 된 것뿐입니다.
저 돌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선생님 가신지 어언 5년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까지도 사용하시던 받침돌...
할말이 없었다.
뒷편으로 와서 본 선생님의 집...
옆쪽의 창틀...
문패 역할을 하는 듯한
하나밖에 없는 출입문 위에 쓰여진 '권정생'
'헐'~~
출입문은 잠겨져 있고
찢어진 문종이 틈 사이에 가만히 앵글을 드밀었다.
그곳에는 조화 몇송이와
아직도 선생님의 영정이 놓여 있었다.
여러권의 동화책도 가지런히 ~~
가만히 방문객을 향해 미소를 머금고 계시는
선생님의 영정을 보는 순간
예상치 못한 나머지 상당히 놀라웠다.
학생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똑똑한 카메라로 촬영하고 계시는 분은
정확하게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중학교 국어나 국사 선생님 같은데...
권정생 선생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이 아시고 계셨다.
옆에서 귀동냥을 하면서
권정생 선생님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생전에 남기고 간 작품은 100여 점에 이른다.
‘강아지똥’ ‘몽실언니’가 각각 100만 부 넘게 팔렸지만
그의 삶은 크게 변한게 없었다.
그는 책에서 연유를 이렇게 밝혔다.
“분수를 지킬 줄 모르면 그 이상 불행할 수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처지에 알맞게 행동하며 지나친 욕심을 버린다면
타인에게 끼치는 해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마당 한켠에 자리잡은 또 다른 작은 집...
다른 식구가 없었던 선생님이 기르던
멍멍이네 집이 아닐까?
문학기행을 온 학생들이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화장실을 둘러보고 있다.
나오면서 기겁을 한다...
고인이 아껴 모은 10억원과 인세는
2009년 설립된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에 돌아갔다.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널리 사랑받아
매년 1억 5000만원의 인세가 재단의 운영비로 기탁되고 있다.
6·25전쟁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여자아이를 그린 ‘몽실언니’는 요즘도 매년 4만 부가 팔린다.
재단은 매해 전국 소외지역 공부방에
총 1만1000권이 넘는 책을 지원하고 있으며,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급식 지원과
결핵사업 지원에도 매년 3900만 원을 후원하고 있다.
앞으로는 국내 어린이들을 위한 장학사업에도 나설 계획이다.
고인의 보석 같은 동화 작품들이 그의 분신처럼 남아
어린이에 대한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생전에 텔레비전도 보셨는가 보다.
마당가 한켠에 다 찌그러져 가는
텔레비전 안테나 사이로
빌뱅이 언덕을 방문중인 학생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귀밑 단발머리에다 땟국에 전 하양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를 입고 등에는 갓난 이복동생을 업은 소녀 몽실이.
권정생 선생님의 <몽실 언니>가
2012년 4월 30일 출간 부수 100만부를 돌파했다.
1984년 발표된 지 28년 만이다.
아동문학에서 100만부를 돌파한 책은
김중미의 <괭이부리말 아이들>,
권정생의 <강아지똥>,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과
<나쁜 어린이표>에 이어 다섯 번째다.
원종찬 아동문학평론가는 고 권정생 선생님을
"한국 아동문학이 낳은 불멸의 주인공” 이라고 칭했다.
이주영 아동문학 박사는
"몽실 언니는 아동문학도 예술작품이란 평가를 받으면서
후배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작품” 이라고 한다.
흙집 뒤의 빌뱅이 언덕을 둘러보고 있는
문학기행을 온 학생들..
권정생 선생님은
떠나서도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 빌뱅이 언덕으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2012년 권정생 선생 시비 제작에
최종 선택된 1편의 시.
빌뱅이 언덕
권 정 생
하늘이 좋아라
노을이 좋아라
해거름 잔솔밭 산허리에
기욱이네 송아지 울음소리
찔레덩굴에 하얀 꽃도
떡갈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하늘이 좋아라
해질녘이면 더욱 좋아라.
자신의 소유로 가진 유일한 재산이었던
7평 남짓한 슬레이트 지붕의 흙벽돌집...
그분이 귀천(歸天)하면서 남긴 유언에는
이집마저 헐어 자연 상태로 되돌려 줄 것을 당부하셨지만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집은 1983년 송리, 조탑리 마을 청년들이
논흙을 파와 일직교회 마당에서 흙 볏짚 물을 배합하여
진흙덩이를 만들어 벽돌을 찍고 햇볕에 말려
빌뱅이 언덕으로 운반해 두 달 넘게 걸려서 지은 집이었다.
그가 살아생전에 거닐던 곳...
집옆의 터밭에는 이렇게 유채꽃이 만개되어
찬란한 오월의 창공을 동시처럼 노래하고 있었다.
권정생 선생님이 사망한 후에,
그가 살았던 동네를 찾아간 사람들이
들은 이야기는 듣는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 사람 평생 자신을 위해서 돈 쓰는 것을 못봤어."
"부녀회에서 김치라도 해다주면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갖다주라고 했어.
참 겸손하고 천사같은 사람이지. 예수가 따로 없어."
권정생 선생님이 살아생전에
작품 활동을 하시면서 기거하시던
흙집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내 머리속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감히 그의 작품 세계와 삶을 논하는 자체가 부끄럽고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찾아본
그의 일대기는 그냥 이렇게
한사람의 작은 블로그에서 노래하기엔
너무나도 크고 웅장했다...
감히 손을 못댈 만큼~~~
너무도 어려운 현실을 이겨내며
자라나는 세대에게 꿈을 주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글을 쓰신 맑은 영혼...
고인의 뜻이 오래도록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그는 가셨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작품들은
우리네 가슴속에 고이 자리잡고 호흡하며
분명 수많은 영혼들의 등불이 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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