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소 '삶은 여행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늘 되새김 하듯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일상에서
경조사나 출타 기회가 주어지면
주변의 볼거리와 이색적인 여행지를
사전에 검색해 보기도 하면서 남들이
무조건 가는 명소보다는 그래도
내가 가고 싶은 장르를 꼭
찾아보게 된다.
남들이 다 좋아하는 '관광지'가 아닌
내가 좋아하고 관심있는 나만의 '여행지'를 찾아...
오늘 포스트한 주제는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고려말 장군인
최영 장군의 묘소 탐방이다.
이곳에 있다는 사전 정보도 없이
도로변의 입간판 하나에 이끌려 방문했으며
묘소를 오고 가는 길의 단아한 숲길이
무척 기억에 남는 시간이었다.
이정표도 잘 되어 있었지만
네비에서 정확하게 주차장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주차장에서 문득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멋진 집한채가 반겨주었다.
사잇길을 통해서 이제
서서히 최영장군의 묘소로 향한다.
인터넷에서 몇번 접하긴 했지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시던 최영 장군의
무덤에는 과연 풀이 자라지 않을까?
물론 잔디를 입혀서 이제는
풀이 안나는 적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묘소를 향하는 숲길이 너무 좋다.
약간의 오르막길이지만 전혀 힘들지 않고
아무나 갈 수 있을 정도다.
힐링로드인 듯 멋진 길이다.
방문객이 아무도 없는 이 길을
홀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닐었다.
그러길 십여분...
문득 눈앞에 나타나는 안내문과 계단...
이제 거의 다 온 모양이다.
다시 계단 오르기를 3분여...
누군가 이 계단이 힘들다고 표현한것 같았는데
전혀 힘들지 않고 그렇게 많지도 않다.
천천히 가도 5분도 안걸린다.
불쑥 눈앞에 나타나는 최영장군의 묘....
고려말 장군이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바로 그 최영 장군의 묘소 앞에 섰다.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뭐랄까 그동안 많이 찾아 다니던
왕릉들과는 또 다른 그런 기분이다.
그럼 먼저 최영 장군에 대해서
백과사전의 도움으로 찾아보도록 하자.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 겸 정치가이다.
본관은 동주(東州)이다. 아버지는 최원직(崔元直)이고,
어머니는 봉산 지씨(鳳山智氏)이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우왕의 왕비인 영비 최씨는 그의 서녀였다.
군관으로 출사하여 우달치에 임명된 뒤 관직은 육도 도순찰사,
양광, 전라도 왜적 체복사 등을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묵호의 난을 진압했고,
1376년(우왕 2)에는 왜구의 침략 때, 육군을 이끌고 논산군 연산의
개태사(開泰寺)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여러 번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었다.
유교 사대부와 동맹을 맺은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명나라가 서북면을 요구하자
요동정벌을 주장하여 요동정벌군 총사령관 겸 팔도도통사에 임명되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반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우왕은 그의 서녀 영비 최씨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고,
이후 우왕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었다.
평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 최원직의 유언을 받들어
평생 여색과 재물을 멀리하였다.
사위는 사공민(司空敏)이고,
손녀 사위는 조선 초기에 좌의정을 역임한 재상 맹사성이다.
정약용 선생의 묘소 탐방때처럼
어김없이 모자를 벗고 잠시 참배를 올렸다.
이럴땐 쐬주나 막걸리라도 올려야 되는게
아닌지 모르지만 늘 빈손이었다.
앞쪽이 최영장군의 묘소이며
뒷쪽이 그의 부친의 묘소라고 한다.
뒷편으로 가서 다시 바라보았다.
둘 부자 지간에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계셨다.
최영 장군은 평소 우직하고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했다.
오늘날까지도 최영이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은 그의 나이 16세 때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었다고 한다.
최영은 아버지의 유언을 평생 실천하며 살았다고하며
이러한 사실은 역사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성품 때문에 최영은 왕들의 신임을 받으며
혼란스러운 고려 말의 국토 방위와 국정 안정을 책임진
최고의 명장으로 후대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왕릉에서 보았던 그런 웅장함은 아니지만
고려말의 전형적인 무덤 형식인 사각형이었다.
최영 장군의 무덤은 오랫동안
풀이 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에는 깃든 이야기가 있다고 전한다.
요동 정벌 실패 후 유배되었던
최영이 개경으로 불려 와 참수되기 전 그에게 내려진 죄목은
'무리하게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며 권세를 탐한 죄'였다.
그러자 최영은 이렇게 말하며 최후를 맞이했다.
"내 평생 남의 것을 탐한 적이 없다. 만약 내가 평생에 있어 탐욕이 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
실제 그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다가
1976년부터 잔디를 조성하여 무성하게 자랐다고 한다.
묘소 앞에는 많은이들이 다녀간 흔적으로
이렇게 큰 소원돌탑이 쌓였다.
작은 돌멩이 하나 주워서
끝자락에 올리고 소원하나 빌었다.
중얼 중얼~~
무덤 주변엔 몇해전에 발생한
화재의 흔적들이 역력했다.
보기에도 흉측했지만 그나마 많이
정리된듯 하였다.
홀로 묘소를 다 둘러보고 내려오면서
방문객 두분과 인사를 나누고 뒷모습 촬영을
흔쾌히 승낙 받았다.
최영 장군의 묘소 탐방...
정확하게 어느 지역에 있는줄도 모르다가
도로변의 안내 표지판을 보고선 문득 방문하게된
아주 특이한 케이스였다.
이런 역사적인 현장 탐방을
개인적으로 워낙 좋아하다 보니
예정에 없는 횡재를 한 셈이 아닐까^^
그 길을 다시금 내려왔다.
역시 이 숲길이 유난히 좋았다.
아름다운 새소리와 계곡물 소리가
발걸음을 더 가볍게 해 주는 양상이었으니
편히 휴식하듯 그렇게 내려올 수 있었다.
싱그러운 잎새를 손으로 만져도 보고
나무에 가만히 귀를 대 보면서 그 소리를
직접 느껴 보면서 말이다.
제작년에 숲 체험에서 배운것을
직접 실천해 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최영 장군...
장군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역사책에 나오는 극히 일부분일 수도 있다.
무엇이 진실이든
그것이 지금의 시대에서는
그렇게 중요하진 않은것 같다.
고려말 어수선한 시대적 정국에서 홍건적과 왜구를
수없이 격퇴하던 최영 장군을 직접 찾아뵙고
참배할 수 있어 무척 벅찬 감동이었다.
경기도 고양 방문시
묵언하듯 거닐며 쉬이 다녀올 수 있는
최영 장군의 묘소에 이제는 푸른 잔디가
넘실 넘실 자라고 있다는 사실^^
행복한 유월되세요^^
'문화유산 답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릉 단오제 참여는 매력적인 추억입니다... (0) | 2016.06.08 |
---|---|
유네스코 지정 인류 무형문화재 강릉단오제 그 현장을 다녀오다.. (0) | 2016.06.07 |
세계에서 유일한 여주 '폰 박물관'과 5년만의 재회... (0) | 2016.05.30 |
문경새재 옛길에서 계절의 여왕 오월을 만끽하다... (0) | 2016.05.18 |
아름다운 영원사에서 석가탄신일 기념 연등 행렬을 마치다... (0) | 2016.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