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오죽헌...
주변에 까만 대나무가 많고
오만원권의 신사임당과 오천원권의
율곡 이이 선생의 생가로 잘 알려진 곳인
오죽헌을 불현듯 다녀왔다.
고등학교 수학여행때 다녀왔으니
30년도 훌쩍 넘어버린 까마득한 날의 추억
한조각만으로 홀로 거닐었다.
특별히 역사 공부를 위해 방문한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문화재 탐방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찾아나선 곳이 강릉 오죽헌이었다.
분명한건 관광이 아닌
여행자의 마음이고 싶었다.
주차장이 넓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는걸 나중에
나오면서 실감할 수 있었다.
입장권은 성인 1인 3,000원이었는데
한복을 입고 방문하면 무료 입장이라는...
정문을 통과해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율곡 이이 선생...
이곳은 포토존의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는 듯 ㅋㅋㅋ
사임당의 셋째 아들 율곡은
외가인 강릉에서 중종 31년에 태어나
여섯살이 되던 해에 경기도 파주 본가에 들어가 자란다.
열 세 살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무려 아홉번 장원급제를 하여 '9도 파도공'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는 아홉번 장원급제를 하고 아홉번이나 벼슬자리를
내놓은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16세 때 어머니 사임당이 돌아가시고
불화로 집을 떠나기도 했다는 당시의 율곡은
1년의 방황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공부에 매진하여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정치개혁자이며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우뚝 선다.
특히 퇴계 이황과 35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넘어선
학문적 교류와 '이기이원론'을 주장했던 이황과 '이기일원론'을 주장한
이이 사이의 논쟁은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학계에서는 전한다.
휴일이라 그런지
방문객들이 정말 많다.
관광버스를 이용한 단체 방문객들이
의외로 많았다.
오래전에 수학여행으로 다녀간 기억은
온데간데 없지만 오죽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인다.
강릉 오죽헌에 대한 안내문을
자세히도 보고 계신다.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들이지만
그래도 현장에서의 공부는 늘 새롭다는것...
강릉 오죽헌...
각종 인터넷이나 사진으로
평소 많이 봐오던 바로 그곳이다.
보물 제16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오죽헌...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서서
맞은편에 바로 보이는 문성사는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오죽헌 앞에는
노거수 배롱나무가 있다.
율곡 선생 당시에도 있던 것으로
수령 600년이 넘는다고 한다.
고사한 원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란 것으로
'사임당 배롱나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오죽헌 보물 제165호...
이 건물은 1452년(문종 2)에 등제하여 대사헌까지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고택에 딸린 별당으로서
1536년(중종 31) 이이가 태어난 곳이다.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일자집이며
대청·온돌방·툇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이가 태어난 우측의 방은 특별히
몽룡실(夢龍室)이라고 한다.
오죽헌과 문성사 주변엔
이렇게 검은 대나무인 오죽이 즐비하다.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알려져 있다.
오죽헌의 뒷모습...
오죽헌의 건축학적인 구조는
커다란 장대석으로 쌓은 단층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결구했으며,
기둥 위에 주두를 놓고 익공으로 처리한 이익공집이다.
앞면에는 띠살창호를, 옆면에는 골판문을 달았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라고 한다.
오죽헌의 왼쪽방은 율곡이 여섯살 때까지 공부하던 곳이고
오른쪽 몽룡실은 1536년 신사임당이 용이 문머리에 서려있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은 곳이며 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건물은 한국주택사에서 현존하는 유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매우 귀중하고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그러나 방과 대청으로만 구성된 별당만 남아 있고
본채가 없어져서 조선 초기의 주택구조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오죽헌 건물과 작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바깥채가 있다.
바깥채 건물 기둥에 추사의 글씨를 집자한 주련이 걸려있어 더욱 아름다운데
추사가 관동여행을 즐기기 위해 강릉에 머물 때
오죽헌에 남긴 글이라고 한다.
안채와 바깥채의 뒷모습...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과
어린시절 사용하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어제각(御製閣)...
정조 임금이 율곡의 벼루와 격몽요결을 따로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가져오게 하여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돌려보냈는데
당시 강원도 관찰사가 이를 보관하기 위해
어제각을 지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최응현에 의해 잘 전승되어 오다가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과 바깥채를 제외하고는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계획에 따라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와~ 우리 수학여행온것 같아"
여학생들의 멘트가 문득 내 귀를 솔깃하게 한다.
수학여행이라는 단어에서 오래전 수학여행으로 다녀갔던
어렴풋한 기억이 추억으로 되새김되었다.
오죽헌을 둘러보고 나오면
앞쪽엔 율곡기념관과 시립박물관 등
다양한 시설물들이 많았다.
율곡기념관에서
오천원권과 오만원권을 만났다.
율곡 기념관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를 비롯하여
매창·옥산 이우 등 율곡 일가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한가지 의문점...
오죽헌에서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무게감을 누구에게 더 많이 안배하고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신사임당인 줄 알았는데
느낌은 율곡 이이 선생에게 더 많이
할애된 느낌이 들었다.
물론 두분 다 존경스러운 분이지만...
그냥 거닐며 오감으로 느끼며 여행만 하려 했는데
자연스럽게 역사 공부까지 하게 되었다.
신사임당...
표정이 어두운건지
차분한건지 조금 헷갈린다.
천재적인 예술가이며 훌륭한 어머니인
사임당의 본명은 인선(仁善)으로
사임당은 그의 당호(堂號)다.
1504년 강원도 강릉 북평촌에서 아버지 신명화와
용인 이씨 사이에 5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강릉 오죽헌...
그동안 강릉을 지나쳐 다니면서
몇번이나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고딩 수학여행 시절 추억의 보따리로
다시 찾고 싶었던 그곳을 이제서야 다녀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선생의
뛰어난 학문적 가치를 이해하고 배운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고딩때의
아련한 추억을 빌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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