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문향 영양에서 시인 오일도 선생의 흔적을 거닐다...

금모래은모래 2015. 12. 11. 06:00

 

 

 

 

문향 영양에서

오일도 시인의 흔적을

만나고 왔습니다.

 

경상북도 최고의 오지라 칭하는

영양이지만 문인들의 배출이 유난히 많아

문향이라 칭하기도 하는 영양에서

시인 오일도 선생의 생가와

시공원을 거닐었습니다.

 

해 넘어 가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오일도 시인의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본관은 낙안(樂安). 본명은 희병(熙秉). 아호는 일도.

경상북도 영양 출신. 아버지는 익휴(益休), 어머니는 의흥 박씨(義興朴氏)이다.

 

14세까지 향리의 사숙(私塾)에서 한문 공부를 한 뒤,

1915년 15세에 한양 조씨(漢陽趙氏) 필현(畢賢)과 결혼하였다.

그 뒤 1918년 영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졸업하지 않았다.

 

덕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근화학교(槿花學校)에서

무보수 교사로 근무하다 고향에 있는 맏형 희태(熙台)로부터

사재(私財)를 얻어 1935년 2월 시 전문잡지 ≪시원 詩苑≫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1935년 12월 5호를 내고 발행이 중단되었다.

 

그 동안 그는 이헌구(李軒求)·김광섭(金珖燮) 등과 가까이 지냈고,

또 ≪시원≫의 발행을 중단한 뒤에도 ≪을해명시선 乙亥名詩選≫(1936)과 요절한

조지훈(趙芝薰)의 형 조동진(趙東振)의 유고 시집인 ≪세림시집≫(1938)을 출판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자

1942년 낙향하여 <과정기 瓜亭記> 등 수필을 쓰면서 칩거하였다.

광복을 맞아 곧 상경하여 문학 활동을 재개하면서 ≪시원≫의 복간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경화증으로 죽었다.

 

 

 

생가로 들어가는 골목길에서

만난 이쁜녀석입니다.

 

 

 

 

영양읍 감천리의

오일도 선생의 생가 마을은

특별히 전통마을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이런식의 골목길이 제법

운치가 있어 좋답니다.

 

 

 

 

오일도 선생의 생가입니다.

 

 

 

 

몇해전에 다녀갔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더군요.

 

 

 

 

텔렌트 오현경 선생님도

어린시절을 이곳을 보냈다고 합니다.

 

 

 

 

생가에는 세월을 잊은 메주들이

주렁주렁하더군요. 

 

 

 

 

이 마을길로 외씨버선길이 지나가더군요.

 

외씨버선길은 경북 청송에서 출발해서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모양새가 외씨버선을 닮았다고 해서

그 이름도 이쁜 외씨버선길이라고 한다네요^^

 

 

 

 

마을 앞에는 연꽃이 피어나는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 위치한 오일도 선생의

시공원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의 작품 활동은 1925년≪조선문단 朝鮮文壇≫ 4호에

시 <한가람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전개한 것은

≪시원≫을 창간하면서부터였는데, 여기에 <노변(爐邊)의 애가(哀歌)>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창을 남쪽으로>·<누른 포도잎>·<벽서 壁書>

<내 연인이여!>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밖에도 다수의 한시 및 한역시를 많이 남겼으나

시집은 한 권도 내지 못하였다.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의 기조 위에

애상과 영탄이 서로 얽혀 있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그의 시는 지성으로 감정을 절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거기에 깃든 애상과 영탄은 그로 하여금 어둡고,

그늘지고, 암울한 정서를 주로 노래하게 만들고 있다.

 

 

 

 

바람이 붑니다...

 

 

 

 

어두워지는 시간이라서

주변 분위기가 뭔가 모르게

더 쓸쓸해 보이구요.

 

 

 

 

코스모스꽃...

가을하늘...

 

 

 

 

오일도 선생은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시문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거의 다 알더군요.

 

그의 시에는

암울했던 시대에

일제에 저항했던 흔적들도

곳곳에서 묻어난다고 하더이다.

 

 

 

 

1935년 4월, ≪시원≫ 2호에 발표된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에서 보이는

‘서리의 독배에 터진 입술’이나 ‘피투성이 낙엽’, ‘대지의 상처’와 같은

심상을 통해서도 낭만과 애상, 그리고 영탄이 얽힌 암울한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오일도는 작품 활동보다는 순수한 시 전문잡지인 ≪시원≫을 창간하여

한국 현대시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더 중요한

시사적 의미를 지니는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유해는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가

1961년경기도 양주군 도농(陶農)에 있는 가족묘지에 이장되었다.

 

기타 유고(遺稿) 시로, <내 창이 바다에 향했기에>·<가을하늘>

코스모스꽃>·<지하실의 달>·<봄아침>·<봄비>·<바람이 붑니다>

<시월(十月)의 정두원(井頭園)>·<송원(松園)의 밤>·<별>·<도요새> 등이 있다.

 

 

 

 

조지훈 선생의 생가가 있는

주실마을에서 느끼는 전통마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순수시를 노래하던 생전의

그의 생각들은 과연 어떤 사조였을까?

 

 

 

문향 영양출신의 대표적인 문인들입니다.

 

현대문학의 거장

이문열 선생도 영양 출신입니다.

 

 

 

 

 

이렇게 지금도 활동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곳에 소개된분들 말고도

제가 알고 있는 문인들만해도

더 많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선배님

몇분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구요.

 

오지의 시골 동네와 같은 영양에서

문인들이 유난히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제 고향이면서도

그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 볼 겨를이 없어

간혹 방문하게 되면 이토록 애절하게

고향을 노래하게 되더군요.

 

 

경북 영양이 문향이라는 사실을

아시는분들이 많지 않을것 같습니다.

 

 

예정에 없이 문득 방문하게된

오일도 선생의 생가와 시공원에서

나만의 시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렇게 거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