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고달사지...

금모래은모래 2011. 9. 30. 16:54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1 일원의

사적382호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세워진

고달사지를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경기도 여주군에 위치한

고달사지에 대해서 각종 자료 등을 참고하여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달사지는

고려 광종이후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절로 성장하였으나

언제인가 문을 닫았는데

그 시기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가을빛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여주 혜목산 고달사지(驪州 高達寺址)에는 

지금은 모두 폐허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당대 사찰의 규모를 알려주는 많은 석조유물들이 남아있다.

 

 


 

 

신라 경덕왕 23년(764) 창건 후,

고려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비호(庇護)를 받은 大刹 이었으나

언제 廢寺가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함.

 

 

신라 때 세워지고

고려왕실의 비호를 받은 대찰이

어이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까?

 

 

 

 

 

 

원종대사 혜진탑비의 기록에 의하면

고달사는 국가가 관장하는 三院 중의 하나로 규모가 크며
고려시대에는 원종대사가 住持로 머무는 등

大刹 의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여주 고달사지 석조(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7호

 

 

고대시대부터 사찰이나 궁궐 등 규모가 크고

사람들이 많이 기거하는 건축 공간에 제작된

수조(水槽)는 일정한 공간에 물을 담아 저장 하거나

곡물을 씻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됐으며

석조(石槽) 또는 목조(木槽) 형태로 제작됐다.

규모는 장변 321cm, 단변 149cm, 높이 98cm로,

한 돌로 치석됐으며,

평면이 긴사각형으로 표면을 고르게 다듬어

전체적으로 정연하면서도 정교한 인상을 주고 있다.

각 면의 모서리 부분을 부드럽게 호형(弧形)으로 다듬어

석공이 세심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치석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절터의 큰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고달사 석대좌  보물 제 8호

 

 

경내에는 고달사지 승탑 (국보 제4호), 

석대좌 (보물 제8호),원 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보물 제6호),

쌍사자석등 (보물 제282호)은 國立中央博物館에 있다.

 

 

 


 

 

이 석불대좌는 불상(佛像)은 없어진 채

대좌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받침돌은 위·중간·아래의 3단으로,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는데,

윗면은 불상이 놓여져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다.

 
조각솜씨가 훌륭한 사각형 대좌의 걸작으로,

절터에 있는 여주 고달사지 승탑이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종대사혜진탑비의 이수와 귀부  보물 제6호..

섬세함이 고려 불교 미술의 극치를 보여줌

  

고달사지에 세워져 있는 비로,

원종대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고달사지 부도와 비좌 및 이수,대좌 등은

고려초의 석조미술 최대 최고의 걸작품이라 함.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으며,

비몸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으로 옮겨져 진열되어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 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돌출시켜 놓았다.

 

 

 

 

 고달사지를 발굴하면서

이런 석조각들이 정확하게 제자리를 찾아갔는지 모르겠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달사지 귀부

 

그냥 지나치고 쉬우면서도

가장 작고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으나

보면 볼수록 친근한 정이 가는 귀부..

 

이름도 호적도 없는 귀부...

 

 

 

 

 

 

고달사지 승탑(부도)-(국보 제4호)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 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 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돌에 꽉 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몸 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 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원종대사 혜진탑에서 국보 4호 승탑을 향해 올라가는

이끼낀 돌계단~~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 보물 제7호

 

넓은 절터 안에 많은 석조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 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이 탑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래 받침돌을 네모반듯하게 짰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가운데 받침돌의 조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 하지만 좋은 비례를 보여준다.

 

 

 


 

 

여주의 고달사지는 개인적으로 집에서 가까워

가끔  홀로 답사를 하는 곳 중 한곳이지만

발굴 이후엔 이렇게 단장이 잘 되어 있어

참 다행스런 생각이 든다.

 

 

 

 

 

여주의 고달사지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근간에 발굴작업 이후 새롭게 잘 단장되어

관심있는 분들의 발길들이 이어지고 있다.   

 

 

 

 

 

주차장을 지나 고달사지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이렇게 멋진 느티나무 한 그루가

오는이를 반기며 잠시라도 쉬어갈 수 있는

자리와 공간을 허락한다. 

 

 

 

 

 

 

2008년 답사때의 사진.

 

 

고달사는 764년(경덕왕 23년)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으며,

다만 전하는 기록과 사지에서 출토되는 유물들로 보아

신라말기 이전에는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달사는 주변 지역에 있는

흥법사, 법천사, 거돈사, 신륵사 등과 함께

한강의 수로 교통 요지에 자리 잡고 있어

불교 신앙의 중심지뿐만 아니라 원으로서의 역할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꾸준하게 지속하면서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고려시대에는 왕실과 밀착된 대규모의 사찰이었다.

 

또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많은 석조미술품들이 조성되어

전하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국보 제4호에서 약 500m거리의 산쪽에 있는

上方下圓形石室墓(석실고분)

 

 

평면이 방형 또는 장방형의 현실(玄室)에

연도가 달려있는 일반적 석실분과는 달리

석실평면이 원형에 연도가 달리고

상부는 방형의 이층기단으로 된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졌음이 밝혀 졌으며,

구조상의 특성을 고려하여

상방하원석실묘 (上方下圓石室墓)라 명명하였다.

 

출토된 유물은 청동숟가락 1점, 청동촉대 1점,

철제 관정 40점, 토기편호 1점, 청자상감운문대접 1점,

백자 1점 및 토기, 청자, 백자편과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고

연도 및 현실 바닥에서 인골 편 등이 출토되었다.

 

 

 

 

 

 

 

 

2008년 답사때의 국보 4호 앞에서 기념샷.... 

 

고달사지 석조는 경기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조성 시기도 빠른 편에 속하여 학술적으로도 중요하다.

또한 현존하는 석조들과 비교해도 우수한 치석과

장식 기법을 보이고 있어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석조로 판단된다.

 

나아가 당시 고달사의 연혁이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유물로 보존할만한 가치와 함께

훌륭한 교육 자료 등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고달사지...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이제까지 다섯번 정도의 답사를 거치면서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갈때마다

조금씩 관리가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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