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에 다녀왔던 영월군 김삿갓면의
김삿갓 유적지를 이제사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진작부터
다녀오고 싶었던 곳이었으며
김삿갓 난고 김병연 선생의 묘를 찾아
그의 삶에 대해서 배워보고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시대적인 배경이 물론 많이 다르겠지만
유적지를 둘러보고 막상 다시금 그의 삶에 대해서
공부를 해 보았더니 도리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기도 하였습니다.
김삿갓 난고 김병연 선생의
유적지 가운데 묘지를 포함한 일부를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삿갓 유적지 진입로에서 만난
멋진 조형물들...
강원도 영월군은 기존의 남면과 서면을
김삿갓면과 한반도면으로 개명한건 다 아실겁니다.
그만큼 영월에서는 이 두곳이 차지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도로변에 어렵게 주차한 후
걸어서 진입해 봅니다.
경북 청송에서 시작되어
영양을 지나 봉화를 경유하는 외씨버선길을
영월에서 만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거닐어 보았습니다.
난고 김병연 선생의 당시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서 말입니다.
의외로 많은분들이 방문했더군요.
주변 계곡이 유난히 빼어나고 물이 맑아
여름한철엔 정말 대단하다고 하네요.
큰 계곡에서 다시 작은 계곡으로 진입하는
김삿갓 유적지의 진입로입니다.
"사진 한장 찍어도 될까요?"
"네 ㅎㅎㅎ"
그 모자와 이 모자가 의미하는 바가 다르고
나름 상징적인듯 했습니다.
방랑시인으로 알려진
난고 김병연 김삿갓 선생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김삿갓으로 불리는 난고 김병연은
1807년(순조 7년)부터 1863년(철종 14년)까지
방랑시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조부는 선천부사 익순이며 아버지인 안근과 어머니 함평 이씨 사이의
2남으로 경기도 양주군에서 출생하였고 이름은 병연, 호는 난고,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으로 불리웁니다.
권문세족인 안동 김씨 가문이었던 집안이 몰락하게 된 것은
조부인 선천부사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을 평정하지 못하고
항복해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입니다.
후일 조부의 죄가 멸족에서
폐족(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됨)으로 감형되었으나 세인의 천대로 모친은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으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김병연은 가문의 내력에 대한 진상을 알지 못한 채 학업에 정진하다
영월도호부 과거(백일장)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하게 되는데,
시제가 바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으로
가산의 정공이 죽음으로 충정된 절개를 지켰음을 찬양하고 적에게 항복한
김익순의 비겁한 죄를 하늘이 알고 있음을 공박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후일 모친으로부터 집안 내력을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에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어둔으로 옮겨
은둔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죄인으로 푸른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다하여 삿갓에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금강산을 시작으로 서울,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제주도 등 전국 각지를 떠돌다가
전남 화순군 동북면 구암리 정시룡 댁에서
1863년 3월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후 3년 뒤 아들 익균이 화순의 초분지를 찾아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현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 기슭으로 이장하였습니다.
그 후 김병연의 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116년만에 발견되어 보존되어 오다가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김삿갓의 시들은 유유자적한 귀족적인 시작(詩作)의 태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 본연의 서정과 빈궁한 평민들의 생활상에 시야를 돌립니다.
이로써 한시의 평민화 경향을 더욱 발전시켜
민중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시 표기에 있어서의 파격은
권위주의로서의 한시 영역을 붕괴시키고 골계미와 해학미라는
새로운 미학으로 한시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유적지에서 가장 독특한 조형물입니다.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요?
묘지로 가면서
이런 당집도 보이더군요.
김삿갓 시의 백미는 바로 해학성과 풍자성에 있는데
잘난 척하는 촌부(村富)나 훈장에게 특휴의 야유와 곡설(曲設)로
풍자하고 힘없는 노인과 부녀자에 대해서는
동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김삿갓 시의 풍자성과 해학성은 새로운
삶의 형식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풍자는 대상에 대한 부정으로써 악덕하고 부조리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부정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해학은 대상에 대한 긍정으로써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인간과 인정이
넘치는 사회에 대한 긍정이었습니다.
김삿갓의 삶의 형식은 바로 악덕하고 부조리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부정이면서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긍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만치 별로 웅장하지도 않고 초라한 듯한 묘지가 보이고
이상하게 생긴 돌비석과 사람들이 몇몇 서성이더군요.
바로 저곳이 김삿갓의 묘지인가 봅니다.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자연석인듯한 상석과 비석들...
그리고 묘비..
나름 시대를 풍미했던 난고 김병연의 묘입니다.
후세들의 평가야 어찌됐건 그는 김삿갓...
안내간판엔 이렇게 단순하게만 표기되어 있더군요.
묘지에서 바라본 지나온 길...
저 아이들은 이 무덤의 주인장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고나 있을까요?
물론 몰라도 그만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사실 저도 기본적인 사항만 알아 포스팅을 위해
뒤늦게 인터넷을 뒤지고 찾아서 다시금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김삿갓 !
그의 본명은 병연(炳淵),
호는 난고(蘭皐)이며 백일장에서 조부를 욕되게 하는 글을 써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 출가하여 삿갓을 쓰고 평생을 방황한 방랑시인이다.
매년 10월 중순 김삿갓묘역이 있는 하동면 노루목 마을에서는
추모제 추모 살풀이춤 추모 퍼포먼스 백일장 등이 다채롭게 벌어져
그의 생애와 시의 세계를 새롭게 조명한다고 합니다.
묘지에서 빠져 나오면서 만난 현대판 김삿갓..ㅎㅎㅎ
멋진 조합이더군요^^
이곳 유적지를 방문하는 이들은
남녀노소 참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김삿갓은 조상에 대한 부끄러움,
막힌 출세길 때문에 평생 한을 품고 살았으며
그 한은 시로써 표출되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이상과 현실의 대립은 자아인식의 대상이 되었고
나아가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발현되었습니다.
즉 끝없는 방랑을 통한 자기 인식이 현실인식으로 발전되었으며
이것이 그의 시로써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방랑을 멈추지 않았던 것도 스스로의 존재인식을
이를 통하여 찾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행지가 아닌 차츰 관광지화 되어가는
영월 김삿갓면의 김삿갓유적지는 제 생각과는
조금 다른 모양새여서 사실 실망감도 조금 컸습니다.
그냥 좋은 곳이며
그의 삶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로 삼기엔 뭔가 부족한...
주변 전체를 둘러보질 못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처음으로 방문한 그곳에서
아니 그의 묘지 앞에서 방랑시인 김삿갓보다는
그냥 어느 한사람의 인생을 느낄 수 있어 다행스러웠습니다.
강원도 영월에는 한반도면뿐 아니라 김삿갓면도 있으며
방랑시인으로 잘 알려진 난고 김병연 선생의
안타까운 삶의 이야기와 그의 묘지를
말없이 서성거릴 수도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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