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슬픈 역사의 주인공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을 다녀왔습니다.
현재 홍릉은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207호 지정 관리되고 있습니다.
물론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도
관리되고 있는 조선 왕릉입니다.
사진 몇장으로 둘러보기엔
너무나도 안타까운 곳이지만 특별한
부연 설명없이 문화재청의 자료를 기준으로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남양주시 홍릉 주차장에 도착하다...
매표소에서 1,000원으로 입장권을 발매하며...
들어가는 길목의 노거수들...
아담하고 예쁘게 조성된 연못엔
각양각색의 수련들이 자태를 뽐내고...
드디어 홍살문이 보이는걸 보니 능에 도착했는가 보다...
그럼 이 홍릉에 대해서 알아보자.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광무 원년(1897) 대한제국 선포로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를 본뜨게 되었다.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면석에 꽃무늬를 새겼으며,
난간 밖으로 둘레돌과 양석을 세우지 않았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에 앞면 5칸·옆면 4칸의 침방이 있는 집 즉,
침전을 세웠으며 문·무인석과 기린·코끼리·사자·낙타 등의 수석을 놓았다.
문·무인석은 크고 전통적인 기법으로 조각되었다.
- 문화재청 발췌 -
아뿔사... 출입금지다...
위쪽에 자리한 능침은 안 보이고
아랫쪽에서 보면 이런 형태만 보인다.
뒤로 물러나니 조금 보이기 시작한다.
능의 역사
1895년(고종 32) 일본 정부의 사주로 낭인에 의해
경복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한 명성황후는
궁궐 밖에서 시신이 소각되었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복호되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당초 동구릉의 숭릉 오른쪽 언덕에 숙릉을 조성하다
국장이 중단된 후 그해 1897년 11월 청량리 천장산 아래
새 장지를 정하고 국장을 치르게 되니 홍릉이란 능호가 시작되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고종이 승하하자
그해 3월 4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하면서 천장론이 일던
명성황후의 릉도 옮겨와 합장으로 예장하였다.
- 문화재청 발췌 -
무엇을 하던 곳일까?
이제 능침이 제법 보인다.
능의 구성
홍릉은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능역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1좌,
그 양 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을 설치하였다.
석물의 배치는 홍전문과 배전 사이에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으로 대칭 되어 있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 옆이 한 단 낮은 삼단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 수복방, 수라간, 비각, 소전대, 어정 등이 배치되어 있다.
금천교 안쪽 좌측에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진입부의 낮은 지역에 원형의 연못에 원형의 섬이 있고 식재되어 있다.
- 문화재청 발췌 -
재실로 들어가 보자...
여느 왕릉의 재실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재궁이라고 하나 보다.
재실 마루위에서 바라본 능침...
이제 제대로 능침이 다 보인다.
그러면 고종은 어떤 인물인가 찾아보자..
고종은 1852년(철종 3) 7월 25일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정선방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1863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위결정권을 쥐고 있던
신정왕후 조씨가 고종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였으며,
그를 익성군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한 뒤 왕위에 오르게 했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케 했다.
그로부터 10년간 흥선대원군의 치세 아래 있던 고종은 장성하면서
친정의 의욕을 내비쳐 아버지와 대립하다가 1873년(고종 10) 친정을 선포하게 되었다.
동시에 외척인 민씨 일가의 권력이 강해졌고,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는 등 대외 개방정책을 취하였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 인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을미사변 등 큰 사건들을 뒤로 하고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며, 그들의 강요로 인해
그해 7월 양위조서를 내리고 순종에게 통치권을 물려주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승하하였으며,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포되어 3.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 문화재청 발췌 -
또 다른 슬픈 이야기...
1863년(철종 14) 12월 조선 25대 왕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고종이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은 대비의 수렴청정과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1873년(고종 10)에는 마침내 친정을 선포하지만, 아버지와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외척인 민씨 일가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여
고종의 입지는 굳건하지 못하였다.
한일합병조약의 체결 후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다가 1926년 승하하였다.
홀로 남겨진 순종의 부인 순정효황후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일제 강점기와 1945년의 광복,
다시 5년 후의 6.25 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슬픈 나날을 지켜보다가
1966년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일제 강점기 당시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11세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인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하였고, 1970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과 마사코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생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 이구는
멸망한 황실의 마지막 황세손으로서 극적인 삶을 살다가
2005년 74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창덕궁 낙선재에 빈청을 마련하였으며,
영친왕이 잠들어있는 영원에 안장되었다.
- 문화재청 발췌 -
재실 뒷편도 상당히 특이하다.
홍릉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위치 :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금곡동)
입장료 : 1,000원
금번의 홍릉 방문에서
기존의 조선왕릉과는 다른점을
많이 찾아 볼 수 있었으며,
당시 시대적인 상황의 안타까움과
힘없는 나라의 비극들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시대에 다시금 돌이켜 볼때
국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남양주에 위치한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
보통은 왕릉을 거닐며 그 고즈넉함에 힐링이 되기도 했지만
이번엔 조금은 복잡한 생각으로 둘러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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