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나라의 국모다"...명성황후 생가를 찾아서...
명성황후 생가를 다녀 왔습니다.
회사에서 20여분 정도 걸리는 곳인데
특별히 쉬는 날이면 가끔 들러서
거닐어 보는곳이랍니다.
월요일 오전에 다녀왔습니다.
명성황후 생가?
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에서
우회전하자 마자 3분여 거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여주 첼시 아울렛 들어가는 반대쪽으로 들어가면
금새 생가에 도착하게 된다.
고종황제(재위 1863~1907)의 비이자
조선의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 민씨(1851~1895)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이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바라본
생가 앞쪽의 모습입니다.
생가 옆에는 다양한 민속 문화가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봄향기 그윽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의 생가 앞 마당...
생가 들어가기 전에
이런 전통놀이 문화가 준비되어 있어
방문객들을 덜 심심하게 해 준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풍경...
여주 도자기를 상징하는 듯해 보였다.
사무실 앞에 걸려있는 망태기가 유난스럽다...
전통혼례식장도 별도로 운영되고 있었다.
생가 들어가는 길목에도 여전히
산수유 꽃이 이렇게 만개를 했다.
명성황후의 생가는
솟을대문을 지나면 ㅡ자형 행랑채가 먼저 보이고,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ㄱ자형 문간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이룬다.
그 옆에는 ㅡ자형 별당이 배치되어 있다.
명성황후의 생가라는 역사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가옥이다.
건축물이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그 모습을 띠고 있었다.
생가는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었다.
저만치 안채가 보이기 시작한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1851)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능은 청량리에 있었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홍릉으로 함께 합장되었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 13년(1687)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마당 한켠엔 민들레 꽃이
깊어가는 봄의 그 여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안채...
뒷뜰...
어린시절의 명성황후가 사용하던 방...
사랑채쪽의 마루...
입구의 솟을대문 앞에는
이렇게 음성으로 이곳을 안내해 주는
음성안내 시스템도 있다.
명성황후 생가의 전체적인 조감도...
생가 뒷편에는 자목련이
그 당시의 아픔을 이야기하 듯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명성황후 생가...
"내가 이 나라의 국모다" 라는
커다란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것 같다.
명성황후 생가와 관련된 사진들이 많아서
이번엔 순수하게 생가 주변만 조명했으며
다음편에 생가 주위의 다양한 문화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